크리스챤 리서치 인스티튜트(Christian Research Institute, CRI) 는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Witness Lee and the Local Church)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이 거짓들과
오역들과 중상적인 비난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대중들이 진리를 알 수 있도록 답을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에서 보면 우리는 반드시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해야 합니다”(엡4:25).
이 팜플렛의 목적은 우리의 신론에 대해 잘못 비난받은 것을 반론하고 삼일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체험에 관한 긍정적인 간증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독자들이 보듯이, 지방교회들 안에 우리는 하나님의 성경적인 계시의 모든 진리와 하나님의 실제의 참된 체험에
대해 절대적입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해 타협하지 않으며 우리의 체험을 부끄럽지 않게 간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합니다(고후4:2).
비 난 들
첫째로, 우리는 반드시 이 책에서 우리에 대해 씌여 있는 비방들을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이 책자는 우리가
양태론자들이라고 합니다. 2세기와 3세기의 양태론은 몇 번의 변화를 거쳐 사벨리우스(Sabellius)때에 가장 분명한 표현에
도달했습니다. 사벨리우스는 하나님이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이 아니고 아들의 계시는 승천과 함께 끝났다고 가르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영원성은 양태론에 의해 부인되었습니다. 삼일성에 대한 양태론적인 관념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등하고 영원히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존재의 세 계승되는 나타남이나 그분의 행동의 세 임시적인 상태라고 여깁니다. 이 책에서 말하길, “거룩한
삼일성에 대해 지방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는 일반적으로 교회사에서 독재론적 양식론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단락 뒷부분에서 말하길
지방교회안에서 가르치는 삼일성의 교리는 “아버지의 인격과 아들의 인격을 동일시 하는 ‘사벨리안주의’ 혹은 ‘양태론’이라고 신학적으로
알려진 일반적인 범주에서 나왔다. 우리를 양태론자들이라고 비난하며 이 책이 나타내기를 우리가 하나님을 “한 개인적인 인격이 자기
자신을 그의 존재의 세 다른 상태나 방면 안으로 주입시키는 분”으로 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구분되는 위격들의
관념”을 무시하고 아버지의 위격과 아들의 위격을 동일시 한다고 비난받았습니다. 우리를 어떠한 사벨리안 종류같다고 비난하며 이
책이 말하길 우리에게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의미없고 더 이상 그 의미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책자가 주장하는 구절들은
마3:17, 26:39, 눅23:34, 요17:4로서 우리에게 “어떤 문제들”을 일으킬 것입니다. 이 책은 우리가 주님의 간구인,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를 “거짓”으로 여기고 그분의 겟세마네에서의 기도인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를 “환각”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본질적으로 이 책은 우리가 “성경적인 삼일성과는 매우 다른”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다고 비난하는데 그들이 말하길 “거룩한 삼일성에 대한 지방교회의 교리는 성경적이지 않고 성경적인 기준에 따라 좋지도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피해야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으로 반론된 비난들
이 책이 비난들을 퍼붓는 철학적인 언어로 가득차 있는데 반해 우리는 이 거짓 비방들을 반론하는데 성경의
언어를 사용하겠습니다. 우리가 아무런 보류없이 온전히 그대로 믿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으로 돌이켜 우리에 대한 비난과 암시가
사실상 진실인지 보겠습니다.
이 책에서는 우리가 양태론자들이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가 이른바 아버지의 인격과 아들의 인격을 동일시 여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비난은 우리가 이사야서 9장 6절을 믿기 때문에 만들어졌습니다. 이 구절은,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혹은 영원의 아버지, 히브리어],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방법은 단지 성경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던지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 있는 삼일 하나님의 계시의 모든 방면을 의문 없이 믿습니다. 이사야 9장 6절이
적절한 경우입니다. 이 구절을 성경의 다른 부분들과 조화시키려는 노력 없이, 사람이 만들어놓은 신학 사상의 조직안으로 강요함
없이, 그 의미를 헛된 해석으로 빠지게 하지 않고, 우리는 단순히 이사야서 9장 6절을 쓰여 있는 대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난
아기는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우리에게 주신바 된 아들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노선을 봅니다. 한 노선은 아이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다른 노선은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만약 첫번째 노선을 믿는다면 두번째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대담하게 선포하기를 우리는 두 노선들 둘 다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순수한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해석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인용한것입니다. 이사야서 9장 6절이 말 그대로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그들의 신학적인 조직 안에 억지로 맞게끔 필사적으로 해석할 필요를 느낀 사람들입니다. 비록 이사야서
9장 6절이 사람의 종교적인 관념과 일치하지 않지만 이것은 순수하고 혼잡케 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렇게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진리의 방면으로 꾸미지 않고 이 구절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선입관에 조화시키려고 이것을 곡해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신학적인 조직을 구성하는데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그것을 받아들이고 믿고 선포합니다.
우리의 비평가들은 큰 실수를 범했는데 그것은 만약 우리가 이사야서 9장 6절에 따라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아들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것을 믿으면 우리는 아버지 아들 성령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분명히 말하는 말씀의 부분들을 믿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러한 결론은 비논리적이며 부당하고 정당성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마태복음 3장 16-17절을 생각해
보십시오:“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아들]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아버지]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우리는 이 소책자가
교묘하게 말하듯 예수님이 아버지의 목소리나 성령의 나타나심을 흉내냈다고 조금도 믿지 않습니다. 이 결정적인 글은 우리에게 이러한
성경이 “더 이상 그 말하는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정당성을 인정하기 어렵게된 전제”라고 쓰여 있는데서 나타납니다. 이 경우는
정확히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비평가들이 마태복음 3장 16-17절에 대해 믿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그것을 믿습니다.
사실상, 우리는 우리의 비평가들보다 더 적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 믿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다 믿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23장 34절을 완전히 믿습니다:“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새”. 비록 양태론들은 이 구절로 어려움을 겪으며
이것을 “거짓”이라 하지만 우리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다른 참된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것이 말 그대로를
의미한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26장 39절과 요한복음 17장 4절도 동일합니다. 사실상,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요한복음 1장 1-2절이나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나누는 요한복음 17장 5절이나 다른 많은 구절들도 그 같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 대한 비난과 반대하여 이 구절들은 우리에게 “아무의미 없는” 것이 되지 않았습니다. 순수한 양심으로 우리가
증거하기를 이 구절들은 하나님이 우리가 함께 증거하시는 이 사실을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믿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양태론과의 어떤 관련도 강하게 거절합니다.
말씀의 몇몇 다른 부분들도 생각해 봅시다. 양태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영원성과 공존을 부인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요한복음 14장 16-17절은 말하길, “내가[아들]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봅니다. 아들이 아버지이며 성령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버지가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고 성령이
더 이상 성령이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이 아이가 더
이상 아이가 아니고 아들이 더 이상 아들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것과 같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공존은 또한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서도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아들]의 은혜와 하나님[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 그리고 에베소서 3장 14-17절에서도 나타납니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아들]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우리는 말씀의 이 부분들에 대해 아무런 어려움도 없습니다. 우리를 비난했던 말인 “그 말씀들이 더 이상 그들에겐 그 말씀이 말하는
의미가 아니다”는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말한 그대로를 의미한다고 믿고 가정( presupposition)을 갖고 그
말씀을 연구하지 않습니다. 비평가들이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말하는 이사야서 9장 6절을 읽을 때나 “이제 주는 영이시니”라고
말하는 고린도후서 3장 17절을 읽을 때 많은 말들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삼일하나님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을 믿으며
우리는 우리의 비평가들에게 그리스도인 대중들앞에서 그들 자신도 우리처럼 이 문제에서 단순하고 철저하고 순수하다는 것을 증명할
부담을 얹어놓습니다. 주님의 긍휼과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조직화하는데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 하시더냐?”(창3:1)
라고 묻는 뱀의 생각으로 말씀을 연구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모든 말씀과 줄과 장에 단순히 “아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말들을 조화시키거나 조직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믿고 행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이 소책자는 삼일성에 귀납적으로 접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으로 시작해서 보류없이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대신, 작가들은 삼일성에 대해 사람이 내린 정의로 시작하였고 성경으로 가서 그것을 구체화했습니다.
이 책에 묘사된 삼일 하나님에 설명의 타당성에 의문을 가하는 것이 우리의 의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작가들이 그들의 인간적인
관념인 정의로 시작하여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가 그들이 이미 믿고 있는 것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았다는 것을 지적하길 원할
뿐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정의나 선입견으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순수하고 혼잡케
되지 않은 말씀을 취하며 그것을 더하거나 빼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말씀에서 무엇인가를 제하는 것을 두려워 할 뿐 아니라 더하는
것 역시 두려워해야 합니다. 잠언 30장 5-6절이 말하길,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을 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그대로 말합시다. 철학과 신학과 관념과 의견과 해석으로 혼합시키면 안됩니다. 이것들은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 들 입니다(고후10:4-5).
삼일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체험의 간증
우리의 믿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을 믿는다는 것을 반복해서 지적해왔습니다. 삼일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한 걸음 더 전진된 간증을 하겠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유일한 한 하나님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전서 8장 4절은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 했고 이사야서 45장 5절은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또한 하나님이 삼일이심을 믿습니다. 이사야 6장 8절이 말하길,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 했으며 창세기 1장 26절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 했습니다. 이 구절들에서와 또 다른 구절들에서 인용할 수 있듯이 “나”는 “우리”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 따라 우리는 한 유일한 삼일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세 분 모두가 하나님임을 믿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벧전 1:2)이고 아들은 하나님(히1:8)이고 성령도 하나님입니다(행5:2-4). 우리는 세 분 모두가 영원하심을
믿습니다.
아버지는 영원하시며(사9:6) 아들도 영원하고(히1:2) 성령도 영원합니다(히9:14). 우리가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는 세 분
모두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4-6절까지에서 우리는 “같은 영”과 “같은 주”와 “같은 하나님”을
봅니다. 이 구절들과 우리가 인용했던 다른 구절들에 따르면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모두 동시에 공존합니다. 애나하임 교회와 위트니스 리와 그의 동역자들의 사역으로 만들어진 “간단한 제시”라는 책의 1장에서 말하길, “우리는 하나님이 오직 한 삼일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동등하게 공존하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 분 모두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영원하고 공존하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양태론자라고 비난 받을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어떤
것을 조직화하지 않고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계시 전체를 받아들입니다. 우리의 비평가들이 우리가 교회들안에서 믿고 체험하는
삼일 하나님이 성경에 계시된 바로 그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지요!
혼잡케 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또한 세 분인 아버지 아들 성령 모두가 한
분임을 믿습니다. 이 시점에서 아마도 우리가 우리의 비평가들보다 더 순수한 말씀을 믿을 것입니다. 성경이 계시하기를 아들은 아버지이고(사9:6,
요14:8-11)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입니다(요10:30).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헬라어에서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이 말하길,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또한 아들인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 “지금
주는 영이시니”(고후3:17)도 믿습니다. 왜 우리의 비평가들은 우리가 이 구절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선포하지 않습니까?
어떤 댓가를 지불하고라도 주님의 순수한 말씀을 증거하는 것 보다 사람의 전통을 변호하는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그들의 전통으로(마15:6) 하나님의 말씀을 “공허하게”만드는 위험에 빠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진리를 말하는
것보다 사람의 생각의 조직을 유지하는데 더 집중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조직화된 오류”(에베소서 4:14, J.N.Darby,
새 번역)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기꺼이 “진리를 사고서 팔지 않겠습니까?”(잠언23:23)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말씀에 대하여 꼼꼼하며 지각력이 있는 로버트 고벳(Robert Govett)에 의하면 신성한 진리는 이중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신성한 진리의 이중성”이라는 그의 글에서 말하길, “성경에서 우리의 관점에 주어진 진리의 이중성은 이것이
사람의 역사가 아니라는 강한 증명이다. 하나를 산출하는 사람의 지성의 영광이다”(p.3). 진리의 두 방면에 관하여 고벳이 말하기를,
“우리가 두 방면을 받고 좇도록 메이기 전에 그 둘을 조화시키려고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둘을 구분하며 지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p.6)라고 했습니다. 고벳이 또한 말하길, “그러면 우리가 그들을 조화시킬 수 있던 없던 둘 다 다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받아들임에 대한 그들의 주장은 우리가 그들을 연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둘 다 증거하셨기 때문이다”(p.8).
우리는 이 원칙을 성경에 있는 삼일 하나님의 계시에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계시의 두 방면-하나님이 세분이시며 한
분이시고 한 분이시며 세분이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 소책자를 펴낸이들이 이 문제에서 우리와 동일한지 증명하기를 권합니다.
누가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계시한 모든 것을 참되게 믿는지 봅시다.
우리가 삼일하나님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에서 진정으로 균형
잡혔으며 양태론이나 삼신론(세 하나님들을 믿음)의 극단으로 빠지지 않습니다. 우리를 비평하는 몇몇은 하나님이 셋안에 하나인 사실에
너무 강조해 삼신론 직전까지 왔습니다. 비록 그들은 그것을 격렬하게 부인하지만,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삼신론자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입지를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지적했듯이, 교회들안에 있는 우리는 보류없이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에
대해 계시한 것의 양 방면을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세분이시며 한 분이시고 한 분이시고 세 분인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처럼 하나님이 셋 안에 한 분이심을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성경의 순수한 말씀을 따라 하나님이 한 분안에 세 분이심을
믿습니다. 이 시점에서 그 저자들이 그들의 책에서 완전히 무시한 위트니스 리의 책 삼일 하나님에 관하여-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29쪽의 한 단락을 인용하는것이 좋을 것같 습니다.
삼일하나님-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분 안에 세분인 방면과 세 분 안에 한 분인 방면도
갖고 계시다. 한 분 안에 세 분으로서 그분은 “나”이고 세분 안에 한 분으로서 그분은 “우리”이다. 한 분 안에계신 세 분의
방면으로 “말씀은 하나님이었고” 세분 안에 계신 한 분의 방면으로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요1:1). 한 분 안에 계신
세 분의 방면으로 “주는 영이시니”이고 세 분 안에 계신 한 분의 방면으로 “주의 영”(고후3:17)이다. 한 분 안에 계신
세 분의 방면으로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이고(요10:30, 14:7-11), 세 분 안에 계신 한 분의 방면으로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고(요1:1-2)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나누며(요17:5),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하시는자이고(요17:24)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가 되었고(요17:11, 21, 22)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같은 행동을 취한다(요14:23).
할렐루야 놀라우신 삼일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참으로 한 분 안에 세 분이시며 세 분 안에 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글에 따르면 우리의 비평가들은 세 분 안에 한 분이신 방면은 믿지만 한 분 안에 세 분이신 방면은 믿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삼일 하나님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비밀이신지요! 얼마나 비밀스러운지 요한복음 1장 1절은 말하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고 하고 또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하며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주는 영이시니”라고 말하며
“주의 영”에 대하여 말하고 히브리서 1장 8-9절에서 아들을 나타내며 “아들...오 하나님...너의 하나님”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한영(엡4:4)을 “일곱영”으로 부릅니다(계1:4, 4:5, 5:6). 비록 우리의 유한한 생각이 삼일하나님의 비밀을 이해할
수 없지만(만약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교만하고 속은 것입니다), 단순한 믿음 안에서 우리는 그분의
계시의 진리를 받을 수 있고 우리의 온 존재인 영과 혼과 몸을 열어 그분으로 채워지고 적셔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체험
이것은 우리를 삼일하나님의 체험의 방면으로 인도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모두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의 체험 안에서 우리가 누리게 하십니다. 아버지는 우리 안에 계시고(엡4:6) 아들은 우리 안에 계시고(요14:20,
골1:27, 고후13:5)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요14:17). 교회들 안에 있는 우리는 교리적인 공식을 강조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삼일하나님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 안에 있는 단순한 믿음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서 그분을 이해하는데
주력하지 않고 우리의 영 안에서 그분을 체험하는데 주력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진리와 체험을 위합니다. 우리가 믿는 진리는
우리가 체험하는 실제입니다.
멜로디랜드 신학교(Melodyland School of Theology)의 총장인 로드맨 윌리암스 박사(Dr.
J.Rodman Williams)는 그의 오순절의 실제라는 책에서 말하길, “성경의 어느 곳도 하나님을 삼일성 혹은 삼일로 믿거나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종종 추측과 추상으로 이끔)은 그리 중요하다고 하지 않다고 했다.. 관심사는 사람들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의 실제안으로 이끌렸는가이다. 첫번째로 이것은 살기 위한 생명의 문제이고 붙잡아야할 가르침이나
교리가 아니다”(p.101). 우리는 이 문제에서 윌리암스 박사와 온전히 동의합니다. 같은 책에서 윌리암스 박사가 말하길, “‘가서..침례주라’
라는 부분의 위대한 명령의 목적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사람들을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의
실제 안에 사는 생명 안으로 이끌라는 것이었다.”(p.102) 우리는 진정으로 동의합니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단지 사람들을
제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실제 안으로 잠기게 하는 것입니다. 이 책에 뒷 부분에서 윌리암스 박사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제자들에게는 분명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하나님에 관한 말이 교리가 아니고 그들이
구원받기 위해 받아들여야하는 난해한 가르침이 아니었다. 대신에 이것은 그들의 삶 안으로 역사 해 들어간 하나님의 실제였다. 이것은
신경(creed)이 아니고 신학(‘삼일성 안에 한 하나님이나 유일성 안에 삼일성’같은)도 아니다. 이것은 모든 상징적인 신학:
사건, 일, 체험을 우월한다.”(p.104) 윌리암스박사가 계속 말하길, “그러므로, 성령에 관하여 말할 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가 붙잡아야 할 교리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야할 실제라는 것이다”(p.105). 우리는 삼일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을 강조한 윌리암스
박사와 동의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으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실제가 우리
온 존재 안으로 채워지는데 배고프고 목마릅니다.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 안에서 단순히 믿음을 사용할 때, 우리는 매일 우리 자신을
주님께 열어드려 그분을 참되게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을 지적하는 구절들을 생각해 봅시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는 사람들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주는 것”에 대하여 말합니다. 이러한 말들은 단지 침례신조가 아닙니다. 이것은 삼일하나님과의 실제의
연결과 그분과의 참된 체험을 나타냅니다. 삼일하나님 그분자신 안의 바로 그 존재 안으로 잠기는 것을 얼마나 누리는지요! 그분은
확실히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입니다 (겔47:5). 우리는 귀용부인의 말을 반향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자와 같고 당신안 에서 비우고 잃은바되고 삼킨바되기를 즐거워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자신 안으로 침례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도 위대합니까! 빈센트(M.R. Vincent)가 신약의 단어 연구집에서 말하길, “거룩한 삼일성의
이름 안으로 침례 받는 것의 의미는 그분과의 영적이고 비밀스러운 연결을 나타낸다... 그 이름은... 신성한 존재의 총체의 표현이다...이것은
그분의 인격과 동일하다...누군가가 삼일성의 이름 안으로 침례를 받을 때, 그는 하나님의 모든 어떠함과 그분이 사람을 위해 하시는
모든 것들 안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승인한다고 고백한다. 그는 아버지 하나님을 그의 창조주와 그의 보호자로 인정하고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유일한 중재자와 구속자로 받아들이며 그의 생활방식도 받아들이고 성령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보혜사라고 고백한다.”
교회들 안에 있는 우리는 단지 삼일하나님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그분의 모든 어떠하심과 그분이 하신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을 승인한다고 증거 합니다.
우리는 단지 삼일하나님 안에 있음을 누릴 뿐 아니라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도 누립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은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이 말씀 안에서 우리는 아들 안에 있는 체험과 아들이 우리 안에 있는 체험을 봅니다. 이런 실제를 갈망하지
않습니까? 같은장 23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길,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우리와 거처를 정하시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체험을 할 수 있을 때 어떻게 단지 교리만으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일서 4장 15절은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약속입니까!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니요! 우리는 이러한 실제를 원합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빌립보서 2장 13절에서 바울이 말하길,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분의 선한 기쁨에 따라 이 세대에서의 그분의 목적을 성취할
갈망에 따라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외적인 성경지식은 결코 우리 안의 하나님의 역사의 실제를 대치할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 3장 7-8절에서 바울이 말하길,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해로 여기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바울을 교회를 핍박하는자로부터 그리스도를 불타게 좇는
자로 변화시킨 것은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체험이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행9:1-9),
바울은 그리스도를 그분의 모든 실제 안에서 얻도록 그를 좇기 시작했습니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에 대한 외적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놀라우신 그리스도 그분 자신의 내적이고 개인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을 쫓습니다.
우리는 또한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이 우리의 매일의 간증임을 선포할수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헬라어참조).
여기서 우리는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는 것을 보는데, 그것은, 그분이 그분의 바로 그 요소로 우리의 온
존재 안으로 스며드는 것입니다. 사람의 교리적인 조직의 선입관이 여러분의 거룩케함을 강탈하도록 허락하겠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요소가 여러분의 온 몸 온 마음 안으로 역사되는 것의 체험을 빼앗기시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대로의 진리를 믿고(엡4:21) 진리를 위하여 싸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사람의 조직화된 신학이 하나님의 실제를
우리로부터 강탈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20-21절에서 바울이 말하길,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세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며 그 앞에서 즐거운 것을 하시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아마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분을 기쁘시게 합니다. 우리는 여기 하나님의 선한 기쁨을
위하여 있습니다(엡1:5, 9).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눈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관심하고 세상의 눈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관심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역사의 목적은 그분의 우리를 통해서 표현되어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위에서의 하나님의
단체적인 표현은 교회로서 그분을 기쁘시게 합니다. 여러분은 아마 성경을 문자적으로 알지 몰라도 여러분 안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는
많이 갖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전통적인 조직신학의 불타는 변호자일 수 있지만 자아로 적셔저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나타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형상의 실제 안에 살아 그분을 표현함으로 그분의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기를
갈망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체험이 더욱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3장 18-19절에서 선포하기를,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실지로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진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은 체험의 문제로 삼일 하나님이 우리의 존 재안으로 역사해 들어오시는 실제적이고 내적인 체험입니다. 이
체험은 위트니스 리가 지은 찬송의 첫 단락과 후렴부에 아름답게 표현되었습니다.
참 기묘해 아버지 아들 성령
셋이나 본질 한 영이실세
영광일세 하나님 내 맘속에 들어와 계셔
내 공급 되시네
삼일의 하나님 내 모든것
참 기묘한 자랑일세
신성의 성분 쓰고도 남네
높고 귀한 영광일세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은 이것을 위한다고 온 우주에 선포합니다. 우리는 놀라우신 삼일 하나님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온 몸과 마음 안으로 스며들어 그분의 충만함으로 우리를 채워 우리가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교회 안에서 그분에게 영광이 있을지어다”(엡3:21).
초 대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여 오늘날 이 땅에서 그분이 그분의 단체적인 표현을
얻는 것입니다. 삼일하나님의 이 단체적인 표현은 교회,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입니다(엡1:23).
대적 사탄의 전략은 사람 안으로의 삼일 하나님의 분배를 좌절시키는 것입니다. 사탄은 거짓말과 허위와 속임수와 사람들을 진정한
교회생활의 실질적인 실제로부터 고립시킴으로 사람의 생각을 가리어 분배를 좌절시킵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서 바울이 말하길,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헬라어참조). 이러한 영적 전쟁의 때에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사람에 비취고 계십니다(고후4:6). 삼일하나님의 빛과 함께 서고 대적의 눈멀게 하는
활동에 대항하는 한 가지 길은 여러분의 생각을 진리에게 진정으로 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거짓말과 편견과 선입견들로 눈멀게
하지 마시며 다른 사람의 판단을 자신의 것으로 무턱대고 취하지 마십시오. 합당한 영과(마5:3) 순수한 마음으로(마5:8) 주님께
나와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십시오. 왜냐하면 언젠가 우리 모두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며(고후5:10)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영은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끕니다(요16:13). 우리의 확신은 그분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무 보류 없이 여러분 자신을 주님께 기꺼이 드리겠습니까?(롬12:1-2) 여러분의 마음을 그분께 돌이켜
수건을 벗은 얼굴로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시겠습니까?(고후3:14-18) 그리고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그분의 뜻을 행하겠습니까?(요7:17)
만약 여러분이 그렇다면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역사할 자유로운 길이 있으시며 그분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여러분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삼일하나님은 그분자신을 여러분 안으로 분배하시어 여러분의 온 존재를 그분으로 가득 채워 여러분이 그분의 단체적인 표현의
한 부분이 되길 원하십니다. 간교한 대적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여러분의 장자권을 강탈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2:8)
교회들 안에 있는 우리는 피로 구속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온 진리를 관심하고 하나님
자신을 실제로 체험하는 것을 관심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임재 안에서 기쁨이 충만하고(시16:11) 복락의 강을 마시며 주의
집의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입니다(시36:8). 우리는 여러분들이 우리와 함께 단순함과 진정으로 삼일하나님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들을 믿는데 하나되고 여러분자신을 그분께 열어드려 그분을 만유 안에 계신 만유로 체험하는데 하나되는데 초대합니다.
1976년 10월 6일
아나하임 교회의 한 형제
란 캥가스 (Ron Kang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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