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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문답자에 대한 답변 (계속됨)

 
 


10월 22일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들이 “성경문답자”에게 답변함

신학적인 훈련에 관하여

10월 8일자 신문에서 3장에 걸친 광고를 통하여 우리는 다섯 명의 신학교 졸업생과 아직 졸업 논문을 내지 않은 멜로디랜드 신학교 졸업생 한 명의 글을 포함시켜서 우리가 견고하고 명망 있는 신학적 훈련이 결여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이 다녔던 각각의 신학교와 졸업날짜와 학위를 모두 명기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문답자는 10월 15일 방송에서 지방교회에는 헬라어나 히브리어에 학식이 있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배웠습니다. 빌 두앤(Bill Duane)은 6년 동안 헬라어를, 3년 동안 히브리어를 공부했습니다. 란 캥거스(Ron Kangas)는 5년 동안 헬라어를 공부했습니다. 더욱이 성경문답자는 “그들 중에는 아마 달라스 신학교 출신 한 사람과 풀러(Fuller) 신학교를 중퇴한 한 사람과 프린스턴 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출신 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함으로 이 기록을 무례히 혹은 고의적으로 낮추어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묻겠습니다. 이것이 공평하고 정직한 것입니까? 그는 분명 사과해야만 합니다.

우리 가운데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더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능력이나 자격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훈련이나 신학적인 배경만으로 그들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성경문답자와 논의하고자 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그의 성경적 언어와 신학 지식을 언급하며 다른 이들도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그러한 것을 가질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반대하고 그분의 이땅에서의 움직이심을 현저히 반대하던 사람들은 문자와 성경교리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과 예수님의 때에 서기관들은 그 시대의 “근본주의적” 신학자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서 그들은 미가서 5장 2절의 성경의 문자를 정확히 인용해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말씀을 정확히 알았지만 그들 자신이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러 동방박사들처럼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마2:1-8). 그들의 성경지식에도 불구하고 이 초대 신학자들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을 죽이려 모의하고 죽음으로까지 정죄하며 십자가에 못박도록 하였으며 십자가에 계신 동안 그분을 정죄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서기관들과 신학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무서운 화를 선고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13절). 그들은 대부분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이러한 방식으로 행해왔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놀라운 일들과 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지르는 것을 보고 분노한이들도 바로 서기관들이었습니다(마21:15). 오늘날 주님의 자녀들은 또 다시 지방교회들 안에서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며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서기관들은 그들의 눈을 치켜 뜨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옛날의 서기관들에게 주셨던 것과 같은 또 하나의 성경 교훈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그렇다 . '어린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하신 말씀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21:16). 그들은 분명 그 말씀을 여러번 읽었지만 그들에게는 최신의 계시가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신학자들도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이것을 지혜롭고 영리한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마11:25).

예수님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놀라며 “이 사람은 배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글을 아느냐?”(요7:15)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를 따르는 이들처럼 사람으로서 하나님에 관하여 배웠습니다. 서기관들과 신학자들은 위대하게 쓰임 받은 제자들인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놀랐습니다(행4:5, 13). 요한과 베드로 역시 하나님에 대하여 깊이 배웠습니다(오순절날 베드로가 전한 말씀이 좋은 예입니다). 한편 바울은 저명한 신학자로 여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학식있는 박사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웠기 때문입니다(행22:3). 그러나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을 알기 전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눈이 멀게 됨으로 깨어져야만 했습니다(행9:3-8). 이것은 성경에 박식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의 상태가 어떠했는가를 보여줍니다. 후에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갈1:11-12). 모든 신학자들이 “눈멀었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가르침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독교계에서 믿음 없고 사악하며 현대주의적인 가르침의 원천이 신학교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근본주의적인 성경 본위의 학교로 시작했다가 점차 극단적인 자유주의가 되어갔습니다. 심지어 오늘날 보수주의 신학교에서도 주님 안에서 산 믿음과 기쁨을 갖고 들어갔다가 지식만 가득하고 메마르고 빈약한 상태로 떠났음을 간증할 수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지방교회들 안에서 그들이 수년간의 성경학교나 신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수개월 간의 교회생활에서 배운 것이 더 많음을 간증하는 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매우 존경받고 널리 읽히는 그리스도인 교사이며 신학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웟치만 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에 있는 단어는 헬라어나 히브리어 이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언어를 아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어떤이는 성경의 교리로만 봉사할 수 있다. 그들은 달리 주 예수님을 사역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문자의 영역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은 영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사람의 생각이나 영리함으로 이해하고 전하는 것을 넘어선다. 영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새롭게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 영문판, pp. 85, 99, 109)

18세기의 유명한 그리스도인 사역자 윌리암 로(William Law)는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신학을 공부하는 것에 관하여 많은 통찰력과 말해냄이 있었습니다. 그는 크리스챤 리터러쳐 크루세이드(Christiam Literature Crusade)에서 출판한 성령의 능력 (The Power of the Spirit)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적 업적과 언변을 통해 교회에서 지위를 얻은 성경 교사와 종교 지도자들과 그들보다 더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차이는 고작 뱀이 (좀더 간교하다는 면에서) 다른 짐승과 다른 그 만큼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p.41). 사람이 덕의 함양과 신성한 지식을 얻는 진정한 수단으로써 자신의 지적 능력과 언어 능력 또는 사람의 지혜에 의존할 때 그는 환상에 빠지게 된다 (p.47). 왜냐하면 천연적으로 비범함과 인간적 지혜는 그 고대의 지식나무의 현혹시키는 열매밖에는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담을 벗고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을 배우려고 헬라어와 히브리어 학교로 가는 것은 사람의 필요와 그리스도의 구원 둘 모두에 대한 얼마나 큰 무지인지! 영리한 언어의 연금술사들과 의견 거래자들, 인간 이성의 숭배자들, 종교 체제의 건축에 열심인 모든이들에게 하나님의 것을 학자답게 연구하려는 열망과 교만은 그들을 신성한 진리에 대하여 심히 무지하게 한다고 말해줘야 한다 (p.51-53). 오늘날 교회 안에서 생명나무는 극단주의자들의 상상 속의 음식으로 야유를 받고... 지식나무는 성직자들과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얻어서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선을 행하고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p. 60). 이것은 최초의 낙원 거주자들에게 지식나무가 행했던 악과 똑같은 것이다.

이것은 “성경문답자”에 대한 답변이라는 제하(題下)의 다섯 기사 가운데 첫 번째 것입니다.

성경을 번역함에 관하여

성경문답자는 윗트니스리와 지방교회가 우리의 회복역 성경에서 성경의 내용을 고치고 더했다고 비난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고치거나 더해진 한 단어를 지적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10월 15일 라디오 방송에서 이 문제가 그의 관심을 끌었을 때 이것을 답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 원문이 부정확한가에 관한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하고 대신 성경 원문에 붙여진 각주에 대해 비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는 그의 비난을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각주에 대하여 그는 우리가 “말의 의미를 바꾸고 그것이 원문이 말하는 의미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전달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번역자는 다른 번역본들처럼 원문에 주석을 달 자유가 있습니다. 이러한 주석이 원문을 형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 성경문답자의 각주에 대한 비평은 완전한 실패였습니다. 그가 언급한 헬라어 히브리어 어휘들은 우리의 각주의 결론을 뒷받침하는 것이지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정반대”의 의미가 아닙니다. 더욱이 성경 단어의 가장 합당한 의미를 찾는 최고의 방법은 성경 그 자체 안에서 그 사용법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성경문답자는 각주에서 두 헬라어 단어들의 정의를 “알다”(know)라는 영어 단어로 번역한 것에 반대했습니다. 헬라어 단어들 기노스코(ginosko)는 외적인 객관적 지식을 의미하고 오이다(oida)는 내적인 주관적 인식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8장 55절과 히브리서 11장 8절은 같은 구절에서 이 두 헬라어 단어들을 사용한 구절입니다. 이 두 구절에서 이러한 단어들의 사용에 대한 한 연구가 우리의 정의를 완전히 실증합니다. 우리는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는 그의 새 번역 성경에서 이 두 헬라어 단어 기노스코와 오이다에 대하여 계시가 있는 믿을 만한 정의를 내렸습니다. 다비는 지난 세기 형제회라 불리는 모임의 최초의 인도자였으며 그가 그들의 주요한 대변자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성경에 관하여 거인이며 주님께 위대하게 쓰임 받은 종으로 헬라어와 히브리어 원문을 직접 영어와 불어와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수많은 주석들을 썼고 그 중에서 성경 개관(Synopsis of the Bible)은 크게 존경받는 작품입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8장 1절 각주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헬라어 단어-기노스코(ginosko)와 오이다(oida)-가 신약에서 ‘알다(to know)'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앞의 것은 객관적인 지식을 나타내는데 사람이 배운 것이나 습득한 것이다. 영어 표현으로는 정통한(being acquainted with)이라는 표현이 아마 그 의미를 전달할 것이다. 오이다는 내적 생각, 생각 안에 있는 내적 인식, 외적인 것으로부터 즉시 나오지 않는 직감적인 지식 등을 시사한다. 이 두 단어의 차이는 요한복음 8장 55절의 ‘너희는 그를 알지(기노스코) 못하되 나는 아노니(오이다)’와 히브리서 8장 11절, ‘주를 알라(기노스코)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오이다)’에서 볼 수 있다.

이 두 단어에 대한 다비의 정의는 우리의 정의와 정확히 부합되며 그것을 확증합니다.

성경 문답자가 이러한 특별한 단어들, 하나는 외적인 객관적 지식을 나타내고 다른 하나는 내적인 주관적 인식을 나타내는 단어들에 의문을 던진 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기독교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내적으로 아는 지식에 대해 실제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며 거의 완전히 교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객관적으로 아는 영역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백성이 단지 외적 지식으로부터 그분을 생명으로 아는 지식을 추구하기를 원한다는 부담으로 우리는 신문이라는 매체와 다른 가능한 수단들을 사용해 진리를 내어놓을 마음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각주에 대한 성경문답자의 비평을 환영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성경원문을 고치거나 더한 것을 지적하든지, 그렇지 않다면 그의 말을 회수할 것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이것은 “성경문답자”에 대한 답변이라는 제하(題下)의 다섯 기사 가운데 두 번째 것입니다.

성경 해석과 우상숭배에 관하여

최근 신문 기사에 따르면 “성경문답자”는 “성경 진리의 전문가”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1977년 10월 8일 방송에서 그는 적어도 네 가지 성경구절에 대해 완전히 틀리거나 진의가 분명치 않은 해석을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지방교회들은 그가 진정으로 그가 말한 것을 믿는지 묻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의 뒷부분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에 대하여 그는 “그것이 말씀을 자신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으로 만들지는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일까요? 이 둘의 비밀을 확인하는데 있어 전치사 “~과 함께”(with)를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단지 본체에서만이 아니라 인격에서 하나의 연합을 증명하는 데 있어 이 구절의 끝에 있는 동사 “이시니라”(was)도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성경문답자는 이 구절 후반부의 “하나님” (God, Theos)앞에 관사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대신 “신격”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 구절은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가 아니라 “말씀은 곧 신격이시니라”로 읽힐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외에도 “하나님” (God, Theos)은 요한복음에서 관사 없이 16번이나 나옵니다. 그런 경우 모두 “하나님”을 “신격”으로 대치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요한복음 1장 6절은 “신격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고 읽어야 하고 요한복음 3장 2절은 “당신은 신격으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로 읽어야 하고 요한복음 17장 3절은 “유일하신 참 신격과 그 보내신 자”라고 읽어야 하고 20장 17절은 “나의 신격, 나의 신격”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지방교회들 안에서 우리는 침례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 받았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17:3)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승천했음을 믿습니다(20:17). 마찬가지로 우리는 요한복음 1장 1절이 단지 본질만이 아닌 인격이신 “하나님”임을 믿습니다.

확대역 성경(Amplified Bible)을 번역한 학자들은 요한복음 1장 1절을 이렇게 쓰고있습니다:

태초에 [모든 시간 전에] 말씀[그리스도]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라.

그들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각주에서 “‘하나님’이 강조된 표현,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이라고 적고있습니다. 지방교회들 안에서 우리는 말씀이 “하나님 자신”임을 믿지만 양태론의 방식으로 믿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반부에 있는 “하나님과 함께 계시니라”를 피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과 함께 계셨음을 비밀스러운 복수성과 단일성의 방식으로 믿습니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45절

고린도 전서 15장 45절 하반절은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합니다. 이 구절을 해석하며 성경 문답자는 이 구절은 문맥상 창조를 말하는 것이며 반드시 요한복음 1장 4절 말씀인 “그 안에[말씀] 생명이 있었으니”의 빛 아래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문맥상 분명히 부활입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42-44절을 연구해 보면 그 문맥을 알 수 있습니다. 42절은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라고 합니다. 그 다음 42-44절에서 우리는 “심고....다시 살며”가 네번이나 반복되어 쓰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원칙입니다. 어떤 것이 한 방면에서 심겨지지만 이와는 다른 방면으로 부활합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42-44절). 45절은 그것이 부활에 관한 논의일 경우 바로 결정타를 날리는 구절입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에서 ‘되었다함과 같이’가 쓰인 것인 바로 그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의 하반부를 요한복음 1장 4절로 해석하는 관점은 확실히 합당한 주해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있는 말씀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말씀(Logos)인 반면 마지막 아담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담”이란 단어의 의미는 사람이고 고린도전서 15장 47절은 명확하게 “둘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미리 존재했던 말씀에 생명이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고린도전서 15장 45절 하반절의 요점은 그것이 아닙니다. 요점은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이 요한복음 1장 14절에 따라 사람이 되시고 마지막 아담으로서 33년의 인생을 거쳐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생명 주는 영”이 “되셨음”입니다.

성경문답자는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의 “생명주는 영”이 성령이 아니라는 상당한 말을 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묻고 싶습니다: 성령 외에 생명을 주는 또 다른 영이 있습니까?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라고 했고 로마서 8장 2절에서 바울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 했고 고린도후서 3장 6절에서는 “영은 살리는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 경우에서 “영”이란 단어는 성령을 나타냈고 매 경우 그 영은 생명을 주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 하반부에 생명을 주는 또 다른 영이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3장 17절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지금) 주는 영이시니”라고 합니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한 질문자가 “17절의 주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 대답은 “내가 믿기로 아버지입니다”였습니다. 같은 논의에서 그는 “아들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처럼 아버지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대답을 수정하여 “나는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서 아버지가 성령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이 바울이 언급한 영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요한복음 4장 24절과도 정확하게 부합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아버지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이 그 영이라고만 말합니다....거기서 절대적으로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앞의 두 답변을 결합해 말했습니다. 첫째로 그는 3장 17절의 “주”가 아버지를 나타낸다고 하였고 두번째로 아버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했고 세번째로 아버지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했고 네 번째로는 절대적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낸다고는 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요한복음 4장 24절로 고린도후서 3장 17절을 해석하며 마쳤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 12절에서 그가 “굉장히 명백하게”(great plainness of speech)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왜 성경문답자는 이 문제를 복잡하게 하는 것입니까? 만약 ‘고린도후서 3장 17절의 주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답변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3장 1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수건을 벗긴다고 했습니다. 16절에서는 계속해서 만약 우리가 수건이 벗겨지는 주관적인 체험을 하길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주님께 돌이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14절에서는 그리스도가 수건을 벗기고 16절에서는 주님이 수건을 벗깁니다. 확실히 16절에 주님은 14절에 그리스도입니다. 17절에서 바울은 오늘날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 “주는 영입니다.” 만약 주님이 영이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가 그분께 돌이키고 그분을 접촉합니까?

18절로 내려가서 우리는 “주”란 단어를 다시 봅니다. 먼저 우리는 반드시 18절의 주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반드시 18절의 주님이 17절의 주님과 다른지 아닌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우리는 3장 17절 상반절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18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 구절에는 “영광”, “주”, “형상”과 같은 단어들이 있습니다. 영광에 대하여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4:6)이라 말했으며 그리스도에 관하여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4:4)이니라 했고 주에 관하여는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4:5)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18절의 주는 반드시 그리스도입니다.

수건을 벗기시는 것은 그리스도이므로 16절의 주가 그리스도임을 보여드렸습니다. 18절의 주 역시 그리스도라는 것을 보여드렸습니다. 우리는 귀납적인 논리에 기초해서 17절의 “영”이신 주가 또한 그리스도임을 단호히 주장합니다. 여기서 아버지가 주라고 말하거나 하나님이 주라고 말하는 것은 이 문맥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삼일성의 구성원의 절대적인 구별 (삼신론과 같은)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그가 제시한 것 같은 해석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신학은 성경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신학을 성경에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 우리는 성경 문답자가 어떻게 그의 신학에 의거해 성경을 해석했는지에 대한 네 번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이 구절에 따르면 사람이 그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시험은 그리스도가 당신 안에 있는지 없는지가 아닙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시험을 통과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시험에 실패한 것입니다.

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질문했던 사람과 똑같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만약 그분이 영이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 안에서 살 수 있습니까? 성경문답자는 ”그리스도가 당신 안에서 거하는 것은 삼일성을 대표하는 성령의 인격 안에서입니다”라고 답하였습니다. 여기서의 문제는 그가 성경을 그의 고상하고 정결한 신학 관념 안에 맞추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생각 안에는 그리스도는 지금 하늘에 계시며 성령은 이 땅위에서 그리스도를 대표하고 있다는 관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성경의 어디에서 성령이 그리스도를 대표한다고 말합니까? 로마서 8장 3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는...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장 10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9-10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이라고 했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을 갖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이라고 했습니다. 이것들은 동등한 용어들입니다.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가 대표되는 방식으로 우리 안에 거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지방교회들 안에서 우리의 간증과 체험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갈망은 하나님의 모든 참된 자녀가 그러한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묵과함

마지막으로 성경문답자는 성경이 우상숭배를 정죄한다고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서의 실행을 묵과했습니다. 그의 설명은 로마 카톨릭이 “신상숭배를 우상숭배”로 정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소위 어느 그리스도인 교회도 그들의 우상숭배 실행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들이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교황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혼들이 연옥에 가고, 떡과 포도주가 문자그대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성체화되고, 주교들이 사도의 진정한 계승자들이며, 마리아가 공동 구속자이고, 물침례의 의식으로 교회의 일원이 되고, 주님의 종들은 결혼하지 말아야 함을 받아들이는 것일까요? 끝이 없고 구역질나게 합니다.

카톨릭교회가 자신들이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도저히 허용할 수 없는 것들을 많이 말합니다. 나는 카톨릭이 베드로가 첫 번째 교황이었다고 말할 때보다도 그들이 신상을 숭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때 그 음녀를 더욱 믿을 수 없습니다.

나는 성경문답자에게 놀랐습니다. 그도 또한 로자리오 묵주를 만지고 성수를 사용하며 성호를 긋는 미신적 실행을 믿는 것일까요?

성경문답자의 교사는 유명한 도날드 그레이 반하우스(Donald Grey Barnhouse)였습니다. 이것이 반하우스박사가 두 바벨론이라는 책의 겉 표지에서 로마 카톨릭 교황에 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두 바벨론: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들은 오래된 주장들이며 종종 오래된 논쟁들에 기초한다...로마의 이단적 실행은 거의 대부분 이교도의 관습으로부터 왔다. 동정녀 마리아를 숭배 (숭상 - 숭배와 같은 것임) 하는 것이 실제로는 비너스와 아스타르테를 숭배하는 것이며 이것은 바벨론으로부터 온 것임을 볼 때 그 체제의 중심이 사탄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형상을 숭배하는 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증가하고 있고 심지어는 미국에서도 그렇다.

계시록 18장 23절에 따르면 만국은 다 그녀의 “복술”에 미혹되었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카톨릭의 말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확실히 미혹된 것입니다. 그리고 카톨릭의 해석을 대중에게 전하는 것은 사람을 속이는 카톨릭의 악한 책략을 돕는 것입니다.

카톨릭의 말을 다른이들에게 전하는 대신 지방교회들 안에 있는 우리는 계시록 18장 4절에서의 요한과 함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문답자”에 대한 답변이라는 제하(題下)의 다섯 기사 가운데 세 번째 것입니다.

삼일 하나님의 성경적인 의미에 관하여

성경문답자가 지방교회들이 믿는 삼일성에 대해 했던 비난들과 거짓 비방들은 그가 우리의 성경 용어 사용법의 이면의 의미를 모르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삼일성에 관하여 말할 때 성경의 언어로 말하기를 선호합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설의 발전의 역사로 인해 삼일성이 아닌 것을 정의하고 이단으로부터 안전하기 위해 성경에 나오지 않는 다른 용어들도 사용했습니다. 역동적 단일신론, 양태론적 단일신론, 삼신론 등의 이단으로 말미암아 일부 신학자들은 조금이라도 이 같은 전통적 삼일성의 이단들처럼 들리는 용어는 사용하기를 겁내게 되었습니다. 성경 문답자도 이러한 범주에 속합니다.

지방교회들은 삼일 하나님을 나타낼 때 성경적 용어로 말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예를 들어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고(사9:6) 주는 영이시라는(고후3:17) 것은 모두 성경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인용들 위에 더해진 해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경 말씀은 합당하게도 사용되고 합당하지 않게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단들이 성경 말씀을 잘못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성경 용어들에 잘못된 의미가 가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일부분을 삭제해버리는 대신 우리의 체험 속의 삼일 하나님을 말해내기 위해 성령에 의해 분별된 언어를 계속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성경문답자는 우리의 성경 말씀을 인용한 것에 이단적인 해석을 붙임으로 윗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를 거짓 비방했습니다. 성경문답자와 그의 동료들과 그리스도인 대중의 유익을 위하여 삼일 하나님의 성경적인 의미에 관한 긍정적인 진술을 제시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삼일(三一)로 계시하셨습니다. 이 계시는 하나님이 세 분인 동시에 한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삼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세 분인 동시에 한 분이심을 다같이 고백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동시에 어떻게 세 분이시며 한 분이신지 분석하려 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삼일성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된 어떠한 문제도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상 삼일 하나님을 계시하는 신약의 구절들은 신학적인 정의보다도 사람이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다음 요점들을 기도를 통해 숙고해 본다면 삼일성에 관한 진리의 계시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1. 성경적인 사실. 삼일 하나님을 계시하는 적어도 일곱 가지의 성경적 사실들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유일하신 한 분 - 사44:6, 고전8:4, 6
    2. 하나님은 삼일이심 - 창1:26, 마28:19, 고후13:13
    3. 세분 모두는 하나님 - 벧전 1:2, 히1:8, 행5:3-4
    4. 세분 모두는 영원하심 - 사9:6, 요1:1, 히9:14
    5. 세분 모두는 동시에 존재하심 - 마3:16-17
    6. 세분 모두는 하나이심 - 요10:30, 14:8-11, 고후3:17
    7. 세분 모두는 우리 안에 계심 - 갈4:6, 엡4:6, 롬8:10, 요14:17
  2. 성경 용어. 삼일성에 관한 진리는 성경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적 용어와 똑같이 표현되어야합니다. 이 원칙은 베드로후서 1:20-21과 고린도전서 2:13의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의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라는 말씀을 비교함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삼일 하나님의 각 방면들을 전달하는 데는 성령이 선택하신 언어를 사용하여 것이 더 좋고 안전합니다. 삼일성에 관하여 말할 때 성경적인 용어로 사용함으로 우리는 성경 안에 있는 객관적인 계시와 하나님에 대한 주관적인 체험을 보존할 것입니다.
  3. 성경적 원칙. 성경이 하나님을 동시에 세 분이며 한 분이시라고 계시하는 것은 모순같아 보입니다. 사실 모순같아 보이는 이것은 신성한 진리의 두 방면 혹은 이중성이라는 성경적 원칙을 계시합니다. 로버트 고벳(Robert Govett, A.D. 1813-1901)은 옥스포드 월체스터 대학의 명예교우(a fellow of Worcester College, Oxford)이며 높이 존경받는 성경 학자로서, 그의 책 신성한 진리의 이중성( The Twofoldness of Divine Truth)에서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무시되고 있는 원칙에 대하여 다루었습니다. 한 성경 진리의 모순처럼 보이는 두 방면들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순은 아닌가? 모순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둘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며 모순의 관계에 있는 둘 모두는 진실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둘은 우리가 그들을 조화시킬 수 있는지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냥 받아들여져야 한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들을 화합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둘 모두를 증거하셨기 때문이다. 그 같은 이중성은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성경진술에서도 나타난다. 성경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확증한다...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신격(Godhead) 안에 있는 인격들(persons)의 구별을 확증한다. “복수성 안의 단일성과 단일성안의 복수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신격의 본성 안에 나타난 이 지배적 진리는 그분의 모든 역사하심 안으로 흘러나간다.

    어떻게 하나님이 동시에 세 분이시며 한 분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양 진리를 뚜렷하게 확증하기 때문입니다. 세 분임과 한 분임은 모두 의문 없이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4. 성경적 이해. 먼저 삼일성의 성경적 이해는 하나님이 어떻게 그분 자신을 계시하시고 역사의 단계에서 그분 자신을 보여주셨는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사람과 더불어 그분의 목적을 성취해 나가는 살아 계신 한 분 하나님의 삼중의 베일을 벗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창조와 구속과 성화에서의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성경 안에 있는 이 경륜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삼일이심을 이해합니다.

    두 번째로, 삼일성의 성경적 이해는 또한 개인적인 체험과 관련되어있습니다. 체험이 없이는 삼일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이해가 없습니다. 바울은 그의 실제의 체험의 맥락에서 삼일성에 대해 말함으로 이것을 분명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4장 6절은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삼일 하나님은 여기서 바울의 마음의 한계 안에서 계시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반드시 우리의 마음 안에서 체험되어 그분이 삼일이심을 성경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5. 성경적 관계. 삼일성의 인격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성경적 계시는 두 종류로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상호적이고 서로 안에 거하는 것을 계시하는 구절들입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4장 9절 하반절부터 10절까지에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는 상호내주(相互內住)입니다. 이것은 각 인격이 상호침투하며 상호내주하는 것입니다. 이 상호내주와 상호침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신격 안에서의 구별을 계시하는 동시에 삼일 하나님이 유일하게 한 분이신 사실을 견지합니다.

    두 번째로 삼일성의 인격들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성경 말씀은 특별히 삼일 하나님의 한 인격이 또 다른 인격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구절들입니다. 이런 종류의 예는 이사야 9장 6절과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아들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리고 또 한편으로 주(그리스도를 나타냄)는 그 영과 동일시됩니다. 즉 “지금 주는 영”이십니다. 인격이 서로 동일시되는 것을 계시하는 구절들은 인격들이 서로 상호 내주하는 것을 계시하는 구절들과 함께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사야가 말한 “아들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이면에 대한 이해가 예수님의 “나는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내 안에”라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둘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고 반드시 함께 취해져야 합니다. 한 구절은 인격들을 동일시하고 다른 구절은 인격들의 상호 내주를 계시합니다. 두 종류의 구절들을 함께 기록함으로써 성경은 성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구절에서 신격 안에서의 하나됨은 한 인격의 역사가 다른 인격에서 기인한 것이 되고 세 인격이 한 하나님(고전8:4, 6)으로서 한 이름(마28:19)으로 기능하는 것을 그 본성으로 갖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스트롱(Augustus Strong)박사는 그의 책 조직신학, 330-334쪽에서 삼일 하나님의 인격들 사이의 성경적인 관계를 상세히 논했습니다. 세 인격들이 한 본질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본질에 있어서의 이러한 하나됨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명하는데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인격 면에서는 서로 구별되는 존재들인 한편 인격들간의 교통이 있고 한 신성한 인격의 내재가 또 다른 분 안에 있어 한 분의 고유한 일이 한가지 제한 아래서 다른 분들에게 속한 것으로 허용되며 한 분의 나타나심은 다른 분의 나타나심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한 가지 제한은 바로 이것이다. 단순히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 보내신 바 되었고, 영은 아들과 아버지에 의해 보내신 바 되었지만 아버지가 아들에 의해 혹은 성령에 의해 보내졌다고 반대로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통에 대한 성경의 설명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고 구분되어 불리는 것이 세 분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됨을 보여준다. 이 교통은 또한 고린도전서 15장 45절 - “마지막 아담은 살리는 영(생명주는 영)이 되었나니” -과 고린도후서 3장 17절 - “주는 영이시니”-와 갈라디아서 4장 6절 - “그 아들의 영을...보내사”-와 빌립보서 1장 19절-“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영”으로서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의 영의 칭호를 설명한다.
  6. 성경적 의미. 삼일성의 성경적 의미는 사람이 하나님을 체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삼일성의 계시에 관련된 모든 구절들은 체험이라는 문맥 안에 있습니다. 삼일성이 단지 신학적 논의의 교리가 된다면 삼일 하나님의 성경적인 의미는 잃어버린 바 되는 것입니다.
  7. 하나님은 삼일로서 첫 번째로 침례받음으로 우리가 그분을 체험하기를 갈망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마28:19); 두 번째로 우리가 바울이 선포한 것처럼 매일매일 그분을 우리의 체험 안에서 누리길 원하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후13:13).

이것은 "성경문답자"에 대한 답변이라는 제하(題下)의 다섯 기사 가운데 네 번째 것입니다.

“분열”, “개종”, “양을 훔침”에 관하여

10월 15일 토요일 두 시간에 걸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성경문답자는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고” “다른 그리스도인 그룹들을 개종시키고” “양을 훔친다”고 비난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대중이 이러한 비난에 대하여 정직하고 솔직한 답을 들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 방송에서 열 두번도 더 언급한 세 가지 비난들을 하나씩 하나씩 검토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나눔”에 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처럼 나뉘어져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많은 분열 가운데서 대변자들과 인도자들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은 “우리는 분열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믿음의 기본적인 교의(敎義)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선포하는데 이것은 실제적인 하나의 필요성에 대한 깨달음이 젼혀 없음을 보여줍니다.

주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라고 기도하셨고 더 나아가서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17:23)라고 하셨습니다.

1900년이 지난 지금도 세상은 여전히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신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하나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관찰한 바에 의하면 믿지 않은 이들은 종종 이러한 질문을 합니다; “모든 분열들과 혼란들이 있는 것은 왜죠? 내가 어느 교회에 가입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나누는 비성경적이고 분열적인 이름들을 갖는 한 주님이 기도하신 하나에 참여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신 것이 아닌 모든 이름들을 버리고 우리가 사는 지방에 있는 교회로서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에 있는 실행으로서 각 교회는 교회가 위치한 시(city)의 이름으로 불러야 합니다. 바울이나 아볼로 등 다른 어떠한 이름을 취하는 것은 분열적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 1절의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로부터 계시록 1장 11절 의 일곱 교회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이름은 신약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교회를 나타내는데 쓰였습니다.

신약 전체를 통하여 교회에게 주어진 성경적인 명칭은 단순히 교회가 위치해 있는 도시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지방 교회들(local churches)이 “지방 교회(The Local Churches)"라고 불리는 것을 거부합니다. 영어의 대문자는 이러한 호칭을 교파의 이름과 동일한 것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용을 강하게 거절합니다. 우리는 아나하임 교회(Church in Anaheim)가 아나하임에 있는 모든 진정한 믿는이들을 포함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들이 실제적인 하나됨 안에서 모이지 않기를 선택한 사실이 분열의 원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지 않고 몸의 참되며 실제적인 하나를 위한 입장에 서있으며 믿는이들이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기초 위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열려 있음을 굳게 선포합니다. 우리는 로마서 14장 1-3절의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는 바울의 권면을 실행합니다.

“개종”에 관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어느 자녀나 그가 받은 빛에 따라 성령으로 인도될 자유가 있음을 굳게 믿습니다. 우리가 교회생활 안에서 발견한 누림을 함께 나누지 않고 모든 주님의 자녀에게 열려있음을 표현하지 않으면 주님 앞에서 우리는 신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의 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교통을 추구하는것 외에 다른 목적으로 다른 그리스도인 그룹의 집회에 참석하지 않습니다. 많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분열적 입장에서 나와 우리와 함께 모이기를 선택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개종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들 자신의 간증은 그들이 우리와 함께 체험한 생명과 하나됨과 그리스도의 누림 안으로 이끌려졌음을 증거합니다.

“양을 훔침”에 관하여

우리는 단지 “그들이 누구의 양입니까?”라고 묻겠습니다. 침례교나 감리교나 장로교의 양입니까? 아니면 어떤 영적 지도자의 양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양입니다. 그분은 “내 양은 내 음성으로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가 감사하며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는 우상도 없고 하나님의 귀한 것들이 이교도와 혼합된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고후 6:16-17)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중시한다고 기쁘게 선포합니다. 이것은 목자의 음성이 양에게 들렸고 양이 그 음성에 반응한 것입니다.

우리가 양을 훔친다는 비난의 논리는 “하늘에서부터 나는 음성”도 양을 훔친다고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음성은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양들이 양의 놀라우신 목자에게 속했으며 양들이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이미 수세기 동안 잃은 바 되었었습니다. 우리 역시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우리 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습니다.” (벧전2:25). 주님은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10:16)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문답자"에 대한 답변이라는 제하(題下)의 다섯 기사 가운데 다섯 번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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