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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문답자에 대한 답변 (계속됨)

 
 


10월 29일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답변

그리스도가 믿는이 안에 없다 - 얼마나 잘못된 가르침인가!

사람들은 스스로를 “성경문답자”라고 부르는 사람에게서 성경에 있는 진정하고 참된 답변을 기대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문답자에게는 아이러니한 것이 있습니다. 물론 아이러니는 기대했던 일이 반대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경문답자의 아이러니는 대중들에게 하는 대답이 성경에 나오는 것인양 가장하여 사실상 성경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대답 가운데 많은 것들이 성경을 곡해하고 그의 선입견에 맞추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라디오 인터뷰

그러한 곡해의 좋은 예가 성경 문답자가 최근의 방송에서 한 답변입니다. 문의자와 성경문답자의 대화에서 문의자는 그리스도가 믿는이들 안에 있는 것에 대하여 질문했습니다. 그 대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성경문답자: “그분이 성령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가 어떻게 당신 안에서 사시겠습니까?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후 지금 이 땅에서 삼일성을 대리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그분이 말씀하시길 ‘내가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리니 내가 가지 않으면 그(성령)가 오지 않으리니.’”

    질문자: “그럼 그리스도가 사실상 내 안에 없다는 말입니까?”

    성경문답자: “제 말은...성령이 삼일성을 대리한다면 그리스도가 당신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질문자: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사실상 내 안에서 사시지 않고 그리스도의 대리가 산다는 말인가요?”

    성경문답자: “글쎄요, 분명하게 해봅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처럼 만질 수 있는 육의 몸과 뼈가 있습니까?

    질문자: “네, 그렇습니다.”

    성경문답자: “그분이 당신 안에 있습니까?”

    질문자: “네, 그렇습니다.”

    성경문답자: “그분의 몸도요?”

    질문자: “그분의 육과 뼈는 아닙니다”

    성경문답자: “그렇다면 그분은 당신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성경의 이름으로 성경문답자는 그리스도인 대중에게 그리스도가 믿는이들 안에서 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문답자는 그의 선입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나와야 합니다.

그리스도 - 대리되지 않고 내주하심

첫째, 요한복음 14장 16-18절을 왜곡한것을 주의하십시오. 이 구절들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성경 문답자는 이 구절들을 사용하여 예수님이 하늘로 되돌아가셨고 성령을 보내어 이 땅에서 그분을 대리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들이 진정으로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순수한 말씀에 나아왔을 때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1. 아들은 아버지에게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할 또다른 보혜사를 보내달라고 했다.
  2. 보혜사는 제자들이 이미 아는 분이며 그들과 함께 있었다.
  3. 보혜사는 제자들 안으로 올 것이다.
  4. 보혜사가 올 때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그들에게 오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셨다. 17절은 “[그 영이]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하며 18절은 “내가[그리스도]가 너희에게 오리라”고 한다. 17절의 “그”는 18절의 “나”임이 순수한 말씀에서 분명하다.

여기에는 그리스도가 하늘로 되돌아가신 동안에 그 영이 이 땅위에서 그리스도를 대리하러 오셨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문답자의 허구적인 상상이며 거짓 해석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하늘에 가고 내가 하늘에 있는 동안 성령이 내려와 나를 대리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내가 그 영을 보내도록 하고 오는 이는 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섯 구절 후인 23절에서 그분 자신과 아버지에 대하여 주님은 “우리가 저에게[믿는이]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삼일하나님이 믿는이들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지적해야 하는 것은 누군가 말씀의 어떤 방면에 대한 시각이 없을 때 그는 그분의 말씀을 부득이하게 왜곡해 그의 관념에 맞춘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두 방면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천연적인 영역과 영적인 영역 모두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귀가 두 개고 눈도 두 개고 손도 두 개입니다. 모든 방에는 서로 맞는 벽이 있습니다. 지구는 두가지 반대되는 힘에 의해 궤도 안에 있습니다. 영적인 영역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문제를 예로들어보겠습니다. 성경문답자는 누가복음 24장 39절을 사용하여 그의 질문자에게 그리스도 그분 자신은 믿는이들 안에 거하지 않는다고 증명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4장 39절은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몸을 갖고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진리의 한 방면입니다. 하지만 성경문답자는 이것은 전체적인 진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는 누가복음 24장 39절을 문자 그대로 취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살과 뼈가 있기 때문에 믿는이 안에 거할 수 없다고 말하는 심각한 이단에 빠졌습니다.

그가 누가복음 24장 39절을 문자 그대로 취했습니다. 따라서 나는 고린도 후서 13장 5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와 에베소서 3장 17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와 로마서 8장 10절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과 골로새서 1장 27절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와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와 갈라디아서 4장 19절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는 왜 문자 그대로 취하지 않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 구절들 안에는 이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 취해서는 안된다는 어떠한 암시도 없습니다.

바울은 두 방면을 표현함

성경문답자가 갖고 있는 문제는 그가 진리의 한 방면에 대하여 커다란 사각지대(blind spot)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경의 한 부분은 받아들이지만 다른 부분은 거절합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의심할 여지없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의 두 방면이 천연적으로 생각하면 서로 배타적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사람의 논리라는 틀 안으로 집어넣으려는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의 두 방면이 바울을 근심하게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그는 한 개의 수식어도 없이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진리들의 두 방면을 표현했습니다. 34절에서 그는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라고 했습니다. 이 뜻은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같은 장 1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이라 했습니다. 진리의 양면은 골로새서에서도 발견됩니다. 바울은 1장 27절에서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고 했고 3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논리적으로 말할 때 만약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신다면 그는 동시에 믿는이들 안에 계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심

이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에 대한 성경적인 시험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믿는이들의 마음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굉장한 이단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대리가 여러분 안에 있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만약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 여러분 안에 없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시험에 실패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성경 문답자는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거하지 않는다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했습니다. 확실히 이것은 커다란 속임입니다. 그는 우리모두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유일한 진리가 그분이 뼈와 살을 갖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했다는 것 뿐이라고 믿게 하려 하였습니다. 그것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면입니다 (마16:19, 눅25:41). 왜 그는 마태복음에 있는 마지막 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를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았을까요? 또한 요한복음은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며 그분이 떠나셨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고 끝난다는 것을 왜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았을까요? 사복음서조차도 진리의 양 방면에 있어 매우 균형잡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고, 또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심지어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말씀하심

한 가지 더 언급하고자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분이 우리 안에서 말씀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13장 3절에서 바울은 명백히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바울 안에 없었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가 바울 안에서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요? 의심할 여지없이 성경문답자는 그리스도가 그분의 대리인 성령을 통해서 말씀하셨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울이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바울이 이 서신서에서 그가 “대단히 분명하게 말하노니”(great plainness of speech, 한글개역본은 담대히 말하노니)라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그가 의미한 것을 정확하게 말했다고 믿습니다.

성경문답자처럼 그리스도가 그분의 백성 안에 거하시고 그들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모든 자녀들과 함께 갖기를 갈망하시는 귀하고 주관적이고 친밀한 교통을 빼앗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생명 없는 종교의 차갑고 메마르고 객관적인 영역 안에 가둡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믿는이들 안에 계시지 않다는 잘못된 가르침이 이단이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답변이라는 제하(題下)의 두 기사 가운데 첫번째 것입니다.

믿는이에게 신성한 본성이 없다 - 어떠한 거짓 가르침인가!

어떤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그리스도 안의 믿는이에게 신성한 본성이 없다는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사들에 따르면 하나님이 그분의 본성을 사람 안에 넣어주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분의 본성을 우리의 본성에 연결시킨다면 우리는 즉시 파괴되어 붕괴될 것이라고합니다. 얼마나 눈멀어 있는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어떠한 무지인지요!

이 거짓 가르침에 대한 두 가지 이유

이 거짓 가르침을 퍼뜨리는 사람들은 두 가지 주요 이유로 그렇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그들은 성경의 주관적인 진리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체험과 관련되어 계시된 진리들, 특히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체험하는 진리들에 대하여(골3:4) 심히 무지합니다. 객관적인 진리를 강조하고 주관적인 진리를 부인 또는 무시하며, 예를 들어 그리스도가 살과 뼈를 가진 부활한 몸으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신다고 명백하게 말하는 구절들에 대해서는 슬며시 피해갑니다(고후13:5, 골1:27). 그들의 제한된 사고방식으로는 객관적이며 주관적인 진리들을 조화시킬 수 없기때문에 그들은 앞의 것을 강조하고 뒤의 것의 중요성을 희석시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영광스럽고 위엄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딤전6:15-16) 사실을 지적하지만 다른 면, 즉 영광스럽고 비밀스러운 삼일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의 역사와 성령이 지금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심을 통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와 함께 거처를 정하신다는(요14:23) 사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을 요한일서 4장 15절의 놀라운 체험인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시는 체험 안으로 안내하지 않습니다. 확실히 그리스도인 대중들이 완전한 진리를 알아야 할 때입니다.

둘째로, 피로 씻음받고 그리스도안에서 영으로 거듭난 믿는이들인 우리가 신성한 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믿는이가 신성한 본성에 참여한다는 의미를 오해하기 때문에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믿는이들이 신성한 본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되는 겆과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새로운 출생을 통하여 신성한 본성에 참여함을 증거할때, 그들은 우리가 믿는이들이 하나님 자신이 되는 점진적인 과정안에 있는 하나님으로의 진화를 가르친다고 악의를 품고 비난합니다. 어떠한 모독입니까! 신성한 본성을 갖는 것과 하나님 자신이 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내 자녀들은 내 생명과 본성을 갖고 있지만 그들은 내가 아니며 내가 될 수도 없습니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본성을 갖고 있지만 아버지의 인격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결코 하나님의 신격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특권은 갖고 있습니다. 믿는이가 하나님 자신이 된다는 것은 이단입니다. 또한, 믿는이들에게 신성한 본성이 없다고 하는 것도 이단입니다. 믿는이들에게 신성한 본성이 없다는 이단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의 계시를 편견없이 고려할때 반론될 수 있습니다.

신성한 본성(개역성경:신의 성품, Divine Nature)에 참여하는 자들

베드로 후서 1장 4절은 믿는이들이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자들”임을 보여줍니다. “참여하는 자들”이라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공동 참여, 공동의 분깃의 몫을 의미합니다.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것은 모든 진정한 믿는이들의 분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점에서 같습니다. 웟치만 니는 “우리가 성령으로부터 난 사람들이기에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존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신성한 본성”이란 말은 말 그대로 신성한 본성, 하나님의 본성을 의미합니다. 믿는이들이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사실입니다. 믿는이들이 하나님의 본성을 갖고 있다는 것도 사실인데 이는 생명과 본성을 나눌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을 단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어떠한 속성이나 미덕들만을 공유한다는 말로 희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공유하는 어떠한 속성이나 미덕은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과 본성의 결과입니다. 5절부터 7절까지에서 언급한 것들은 신성한 생명의 결과일뿐 아니라 표현입니다. 모든 진정한 믿는이들이 선입견을 버리고 베드로 후서 1장 4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이 구절은 명백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이들인 우리가 신성한 본성을 함께 나눈다고 말합니다.

거듭날 때 받은 신성한 본성

베드로 후서 1장 4절이 아니더라도 거듭남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로 우리가 신성한 본성을 가졌음을 추측할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이가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사실입니다. 우리는 단지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거듭남을 통해 사실상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있고 하나님의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과 13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들은 하나님께로서 나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요일 3:2). 각 자녀마다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생명의 실제입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남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을 갖고 있는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신성한 씨안에 있는 신성한 본성

신성한 본성은 우리가 거듭날때 우리안에 들어오는 신성한 씨안에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 1장 23절은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썩지 아니할 씨로 거듭났습니다. 거듭난 이후로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씨가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9절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라고 합니다. 이 씨 안에는 죄를 지을 수 없는 하나님의 본성이 있습니다. 죄는 신성한 본성과 반대됩니다. 만약 우리가 신성한 씨가 있고 거듭남의 역사가 이뤄진(요3:6) 우리의 영안에서 머묾으로 주님안에 거한다면 우리는 죄를 짓지 아니할 터인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에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장에서 우리는 반대되는 두 본성의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사탄의 본성의 결과는 죄이고 신성한 씨 안에 있는 신성한 본성의 결과는 의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모든 이들은 그 안에 이 놀라운 신성한 씨를 갖고 있습니다.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히브리서 2장 11절은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왜 주님이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그분과 우리가 하나에서 나왔기에(out of),즉, 같은 근원에서 나왔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리스도가 많은 형제들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그분의 독생자인 그리스도가 그분의 형상을 이룬(롬8:29) 많은 형제들중 맏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하여 우리는 많은 형제들이고, 아버지께 대하여는 많은 아들들입니다. 많은 형제들과 맏아들은 생명과 본성에서 같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많은 형제들이 될 수 있습니까? 히브리서 2장 11절에 의하면 우리는 한 근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하나님의 맏아들인 그리스도이고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인 그리스도의 믿는이들입니다. 맏아들과 많은 아들들 모두 부활 안에서 같은 아버지 하나님께로서 나왔습니다(행13:33, 벧전1:3). 맏아들과 많은 아들들 모두 신성한 생명과 본성 안에서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습니다. 그분이 부활하시기 전에는 제자들에게 사용하셨던 가장 친밀한 단어가 “친구들”(요15:14-15) 이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후에는 “형제들”(요20:17)이라 부르셨는데 이는 그분의 부활을 통해 제자들이 거듭났기 때문입니다(벧전 1:3).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분과 생명 안에서 하나이며 그분의 신성한 본성을 함께 나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믿는이가 신성한 생명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이 아니지만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확실히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명백히 우리가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들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신성한 씨는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맏아들인 그리스도의 형제들입니다. 이러한 진리들은 그리스도 주 안에 있는 믿는이들인 우리가 신성한 본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격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본성에는 참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영원한 목적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의 본성이 우리 안으로 역사해 들어옵니다. 그분의 거룩한 말씀 안에서 계시된 이 귀한 주관적인 진리들로 인해 주님께 얼마나 감사한지요! 주님께서 그분의 진리를 입증하시고 그분을 추구하는 이들을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체험 안으로 이끄시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답변 이라는 제하(題下)의 두 기사 가운데 마지막 것입니다.

우리의 간증-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누림

우리는 대부분의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금 있는 곳에 있었지만 그분의 긍휼로 주님은 우리를 또 다른 영역으로 옮기시어 그리스도안에서 넘치는 생명의 풍성이 우리의 분깃과 체험과 누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풍성들을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모든 형제자매들과 함께 누리도록 깊이 강권되었습니다. 이 풍성들이 우리의 것뿐이 아니라 그들의 분깃이요 그들의 상속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살아있는 믿음으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우리가 서 있는 이 놀라운 은혜 안으로 이끌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우리가 매 토요일마다 이러한 기사들을 발표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찾음

얼마 전에 우리는 성경 학교와 신학교에서 가르침과 교리와 설교의 영역 안에 있으며 우리의 생각을 지식으로 채웠었지만 내적으로는 너무 공허하고 메마르고 빈약했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조직들과 여러 종류의 사역들 안에서 사람들을 얻고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 수고했었지만 우리 자신들은 지치고 영양실조가 걸렸었습니다. 우리는 카리스마 움직임에 있으며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병고침을 받았지만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불안하고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휴양소에서 (혹은 전진지-the advances 에서) 더 많은 것을 추구하고 찾고 접촉하려 하여 가끔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계곡으로 쉽게 떨어졌습니다. 한편,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가대와 솔로와 사중주와 밴드와 연극과 영화의 끊임없는 크리스챤 오락의 공새아래 있었습니다. 이것이 또다른 덮개 아래 있는 옛 세상이라는 것이 숨어있는 느낌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맛보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깨뜨리셨습니다. 우리는 다시는 그 잿더미로 그 쓰레기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읽었지만 보지 못한 풍성한 생명은 어디 있습니까? 체험하지 못했지만 우리가 노래한 충만한 기쁨은 어디 있습니까? 모든 것을 떠나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서 갈망한 하나됨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그 대신 보아온것은 지위를 향한 야망과 정치와 다툼과 불평과 자기발전과 자기 영광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되돌아갈 수 없지만 어떻게 나아갈 수 있습니까?

해답이 없고 길이 없음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고 계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배웠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소위 말하는 더 깊은 생명과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십자가에 못박힌 삶에 대해 들어왔고 예전에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과 빌립보서 1장 21절같은 구절들을 암송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단지 교리에 불과했었고 우리의 일상 체험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마치 문을 열 열쇠가 없는것처럼 체험안으로 들어갈 실제적인 길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가르침을 알았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길은 수수께끼였습니다. 항상 잡으려 해도 잡히지가 않았습니다. 가까이 있는 것 처럼 보였지만 너무 멀리있었습니다.

우리중 몇몇은 교파를 떠나 작지만 교파로 나뉘어지지 않고 더욱 헌신된 그리스도인 단체들로서 모이기 시작하여 더 많은 성경 공부를 하고 더 교통하고 더 참여하며 더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공허함이 있었고 집에 있다는 느낌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주여, 더 좋은 곳이 있다면 우리를 그 안으로 이끄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족하시지 않으면 우리도 결코 만족할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만족하시지 않았고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외적으로 보기에는 혼돈과 무질서와 불화가 있었고 우리도 그것들의 일부였습니다. 내적으로는 공허함과 만족하지 못함과 기다림과 울부짓음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안주했냐고요? 우리 안에 무엇인가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했지만 갈 곳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있었습니다!

놀라운 발견

주님은 우리가 전에 결코 본적이 없는 우리 안에 있는 어떠한 부분을 보여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교리 적으로 그것이 있는 줄은 알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놀라운 발견을 했습니다. 우리 사람의 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 이 두 곳에서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것을 전에는 놓쳤었는지요? 성경전체는 이 문제를 열기 시작해 우리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특히 신약에서 사람의 영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영이 하나님과 그분의 목적을 성취함과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들은 우리에게 김은 인상을 주며 온전히 빛비춥니다: 요한복음 3장 6절,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한복음 4장 24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실제(spirit and reality, 한국어 성경은 신령과 실제)로 예배할지니라”, 로마서 8장 16절,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 디모데후서 4장 22절, “나는 주께서 네 영(spirit, 한국어 성경은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고린도전서 6장 17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랍습니다! 우리는 보았습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 사람의 영안으로 주 예수님이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사람의 영안에서 우리는 주 예수님과 하나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을 차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그분이 계시는 정확한 곳을 알았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너무 가까우시며 이용할 수 있고(available) 주관적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신 것을 알았지만 그분은 또한 우리의 영안에서 우리와 하나되셨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이 있었고 우리는 그곳에 가는 다른 이들을 발견했습니다.

마치 우리가 모든 것이 다르고 모든 것이 초월하고 새롭게 살아있고 거룩한곳, 하늘로부터 너무 멀지 않고 바로 우리 존재 안에 있는 새로운 나라나 영역을 발견한 것 같았습니다. 우린 언제 어디서나 그곳에 가서 달콤한 교통을 갖고 그분의 임재를 극도로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에 그러한 체험을 맛보았지만 거의 우연이었고 기껏해야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 놀라운 인격, 우리의 친근한 내주 하시는 주님을 지속적으로 계속 만질 수 있습니다.

최고로 누리는 방법

더구나,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이 놀라우신 인격을 누리는 가장 실제적이고 성경적인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안에서뿐 아니라 우리의 온 존재 안에서 그분으로 채워질 수 있는 길을 발견했습니다. 할렐루야! 이 시점에서 성경은 진정으로 열려졌고 우리에게 새로운 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찬양해도 부족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누릴 곳을 찾았고 우리는 그분을 누리고 채워질 방법도 찾았습니다. 우리가 물질적으로 먹고 마심으로 채워지듯이 영적으로도 먹고 마심으로 채워집니다. 먹고 마시는 겁니다! 이것이 그리 새롭지 않았지만 전적으로 새로웠습니다. 우리의 물질적인 먹고 마심은 그림이고 그림자이며 하나님은 사람이 그분을 진정한 음식과 진정한 생명 공급으로서 취하길 예정하셨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 안에서 영으로서 그분자신이 우리에게 너무 이용하기(available) 쉽게 만드셨고 과정을 거쳐 우리가 그분, 바로 그 신성한 인격을 우리 존재 안으로 받을 수 있게 하셨고 특별히 이러한 목적으로 우리를 창조하셨음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말들을 지원할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체현이신 주 예수님 자신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6:35, 54-57). 만약 주님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그러한 관념은 우리에게 완전히 낯설고 우리는 그러한 말을 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천연적인 관념이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주님 자신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고 지금 이것은 우리의 체험과 매일의 누림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먹을 수 있고 우리가 그분을 먹으면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물질적으로 먹는 문제에 아주 친숙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에 의하여 살고 영양사들이 항상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듯이 우리는 심지어 우리가 먹는 것이 되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물질적인 현상을 사용하여 참 음식이신 그분자신을 진정으로 먹고사는 것에 대한 그림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먹을 때 즉각적으로 우리는 그분에 의하여 사는데 이는 물질적인 음식이 우리의 부분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바로 그 존재 안으로 그분이 역사해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으로 들어오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를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자연적으로 표현합니다.

새로운 존재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서는 수 없이 들어왔지만 하나님을 먹는다는 것은 결코 들어본 적이 없으며 그러한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독자들 몇몇은 이러한 말들에 놀라서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동감하지만 아직 외면하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 그 당시에 “근본주의적” 종교적인 사람들인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심지어는 제자들도 이것을 듣고,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들을 수 있느냐”라고 했고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고 했습니다(요6:52, 60, 66). 그러한 사상은 그들의 종교적인 이해뿐 아니라 천연적인 관념에는 완전히 낯선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영안에서 가난하지 않고 단순한 교리나 규제나 종교적인 의식보다 더 깊은 것에 대해 배고프고 추구하지 않으면 우리 역시 떠날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근본적이고 성경적일지는 모르겠지만 객관적인 종교로 나아갈 수는 있지만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 자신이 사시고 우리의 바로 그 인격이 되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말할 수 없는 풍성한 누림으로 잔치하는 것에는 참예하지 못할 것입니다.

불평하고 성난 제자들 가운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6:63)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상상한 것처럼 이것은 결코 식인(cannibalism)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을 먹기 위하여 우리는 그분을 생명 주는 영으로서 우리 존재 안으로 취합니다. 주의해서 보면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먼저 너희가 나를 먹으면 너희가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후에 말씀하시길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영광스러운 좋은 소식은 그리스도안에 계신 하나님을 그 영으로서 우리가 먹고 마셔 우리 존재 안으로 동화시킬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먹은 물질적인 음식이 우리 안에서 소화되어 우리 존재의 부분이 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먹을 때 신진대사의 과정이 일어나고 우리의 존재는 우리가 먹은 것에 따라 변화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먹을 때, 우리의 존재는 그리스도에 따라 내적으로 변화됩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간증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이러한 신성한 잔치를 사실상 체험하고 있어 우리는 다른 생명, 그리스도로 삽니다.

생명의 말씀

하지만 실지적으로 실제상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안으로 취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그분을 먹고 마실 수 있습니까? 오, 우리에게 길이 있음으로 우리가 그분을 찬양합니다! 그분이 같은 단락에서 말씀하시길,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먹고 마시는 것은 그분이 우리 존재의 깊은 곳 안으로 말씀하신 말씀을 취하는 것인데 그것들은 단지 교리나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영이요 생명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앞에 올 때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우리에게 말씀하실때 우리는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인 우리의 영을 말씀에 엽니다. 우리 자신을 열지 않고는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먹을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열어 생명을 만지고 말씀안에 있는 생명을 받아들일때 종교적인 지식과 관념과 전통들을 내려 놓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열어 그분의 말씀안에서 그분의 모든 풍성과 충만함으로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열어 놓으신 영으로서의 그리스도안에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취합니다.

말씀은 교리에 유익하지만(딤후3:16) 본래 교리는 아닙니다. 말씀은 영과 생명입니다. 우리 모두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먼저 교리가 아니라 영과 생명입니다. 만약 우리가 죽어있다면 교리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오,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으로 살아있고 넘쳐흐름이 얼마나 필요한지요! 그러면 생명은 우리에게 빛이 되고 살아있는 지식이 되고 정상적이고 건강한 교리가 됩니다. 빛 다음에 생명이 아니라 생명다음에 빛입니다.

말씀을 취하는 법

영이신 그분의 말씀을 우리 존재 안으로 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말씀을 기도로 읽고 계속해서 읽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에베소서 6장 17-18절을 문자 그대로 원문에서부터 번역하면:“모든 기도와 간구로 영안에서 수시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인 영(spirit)의 검을 취하라”(Marshall's Interlinear Greek-English New Testament를 보십시오)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방법으로 말씀을 접할 때, 그 말들은 페이지에서 뛰어 나와 우리 안으로 들어와 우리의 생각보다 더 깊은 곳을 관통할 것입니다. 게다가 동시에 우리의 생각도 새롭게 되고 하나님의 살아있는 지식으로 빛비춤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과 빛으로 가득차있습니다. 말씀이 기도로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지요! 말씀이 우리 안으로 들어올 때 하나님도 우리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어떤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에 매달리며 그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길,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순간적인 계시로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는 분명했고 비밀이 있었고 영생의 말씀이라는 열쇠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 어떻게 하고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우리에게 은혜의 말씀(행20:32)이고 누림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 안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영접하고 먹고 심지어는 소화시킵니다.

그분의 이름을 부름

그분은 우리에게 영과 생명인 그분의 말씀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이름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이 있고 그분의 이름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사람들에게 주신”(행4:12)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주님의 바로 그 인격의 체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말할 수 없이 풍성하고 높고 귀합니다. 우리중의 많은 이들은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 구원받았습니다(롬10:13). 그리고 계속해서 그분을 부를 필요와 기쁨과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놀라운 공급도 발견했습니다. 시편기자가 말하길, “내 평생 주의 이름을 부르리”(시편116:2, I will call upon him as long as I live, 한국어 성경: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우리의 삶에서 몇 번이나 우리의 깊은 존재로부터 그분을 부릅니까! “오 주 예수! 오 주 예수!”라고 몇 번이나 크게 몇 번이나 조용하게 부릅니까! 이것은 마치 생명수를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나 완전히 새롭고 너무나 생명을 주며 너무나 높고 너무나 해방이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실지적으로 주님을 마십니까? 그분의 친근하고 놀라운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이름을 부르는 것과 잔을 마시는 것을 연결시켰습니다.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시편116:13).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잔이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 매일 우리가 죄와 육체와 우리의 자아와 세상과 다수의 것들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포함함을 증거 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동시에 우리가 필요한 것들인 생명과 기쁨과 평강과 지혜와 능력으로 공급받습니다. 이것을 체험해 보셨습니까? 구원의 보물들과 은혜는 부를 때 있습니다.

옛 찬송 작가의 글:

축복의 주 능력의 구주
내 모든 필요 채워
주의 이름 호흡함이
참 생명을 마심일세
M. E. Barber

다른 작가의 글:

예수 예수 나의 생명 주 사랑하므로
주 이름 하루에 천번부르게 하소서
F. W. Faber

우리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시대의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른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불렀습니다. 시편은 “오 주여”와 “오 하나님”으로 가득합니다. 초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다메섹으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결박하려고 갔기 때문입니다(행9:14). 주님은 참으로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십니다”(롬10:12). 우리는 이제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고전1:2)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모입니다(딤후2:22).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놀라운 은혜와 구원과 누림을 세상에 외치기를 원합니다.

우리 마음의 갈망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것이며 그분을 먹고 마심으로 우리는 그분과 하나되고 서로서로 영광스러운 하나됨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요! 오, 이것은 더할나위없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종교적인 이름들이나 규칙이나 관습들을 관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이 땅위에 하나됨 안에서 체험하고 누리고 온전히 표현하는 살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관심 합니다.

우리는 열렬히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백성들이 우리와 함께 잔치하고 그들이 창조된 목적, 그들이 구원받은 목적인 그리스도안에 하나님께서 그 영으로서 그들의 온 존재를 채우고 충만하게 하며 넘쳐흐르게 하고 그리스도안에서 다른 이들과 영광스러운 하나됨 안에서 함께 건축되는 것을 누리는 것을 기다려왔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또한 아직까지 이 놀라운 인격을 영접하지 못한 모든 이들에게 향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생명수를 마시는 이의 숫자를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22:17).

우리는 보배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하게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듣고 본 것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굶고 있을 때, 풍성가운데 잔치하며 침묵한다면, 우리는 사람들을 향한 마음이 없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구약에서 기아(famine)의 때 음식을 찾으려는 희망으로 그들의 목숨을 건 문둥병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배고픈 자들이 찾은 것은 그들의 필요이상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보배와 풍성한 식량을 찾았습니다. 실로 그들의 말은 우리의 말입니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왕하7:9). 와서 보십시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길, 오라 하는 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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