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home
 
 
home > 답변

성경문답자에 대한 답변 (계속됨)

 
 

11월 5일

교회들의 간증

틀린 인용과 허위 진술

지난 몇 주 동안 성경 문답자(the Bible Answer Man)는 윗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를 공격했고 그들이 모든 종류의 이단적인 가르침을 가르친다고 거짓 비난했습니다. 그가 결코 답변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윗트니스 리의 인용들과 틀린 인용들이 그의 반대의 핵심입니다. 사실상, 그가 공격했던 항목들은 The Register 신문에 지난달 공개적으로 상세히 답변되었고 분석되었습니다. 이러한 거짓 비방들에 답하며 지방교회에 있는 이들이 그에게 질문을 했는데 이제까지 그는 실제 질문들을 회피하는 전통적이고 틀에 박힌 가르침들(traditional formulistic teachings)로 답해왔었습니다.

그 동안 쓰여진 모든 것들을 무시하는 듯이 성경 문답자는 계속해서 같은 비난 내용들을 방송했습니다. 그가 사용한 인용들은 철저하게 문맥의 내용에서 고립되었으며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던 의미들을 전달하였습니다. 보통 청취자들은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에 인용문이 윗트니스 리의 관점을 그대로 전달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것은 정반대입니다. 이것이 조사(research)를 잘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인지는 오직 성경문답자만이 알고 있습니다.

이 중 주요한 예는 윗트니스 리의 책 “교회의 실제적인 표현”에서 인용하여 지난 몇 주 동안 “하나 안에 넷”이라고 계속 말했습니다. 다시 한번 1977년 10월 29일 토요일에 성경 문답자는 이 단락을 틀리게 인용하고, 잘못 해석함으로 윗트니스 리가 “극단적인 이단”을 가르치는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방송에서는 오만한 확신을 갖고 인용을 했지만, 누구라도 그 책을 읽었다면 43페이지에서 사실상 의미하는 것과 인용된 것은 언뜻 비슷하게 보이지만 43페이지의 전체 내용을 비교해보면 그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성경 문답자: “여기서 인용을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주님은 그 영이고, 그 영은 바로 그 삼일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성령은 지금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성령이 되셨습니다. 성령은 삼일 하나님입니다. 다시 한번, 그들은 지금 하나 안에 넷입니다. 이것을 보셨습니까? 하나 안에 넷,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몸. 대문자 B가 쓰였습니다. 몸은 교회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질문자: “그것이 그들이 노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문답자: “그것이 그들이 노리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1970년의 윗트니스리의 소책자, 교회의 실제적인 표현 43페이지에서 직접 인용한 것입니다. 지방교회 사람들이 듣고 있을 경우, 여러분의 인도자는 성경을 반대하여 말하고 심각한 이단을 가르칩니다. 그 이단은 셋이 아닌 넷,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이단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되셨고, 아들은 성령이 되시고, 성령은 교회가 됩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전적으로 허튼 소리입니다.”

이 점을 완전히 틀리게 인용했을 뿐 아니라 그는 더 형편없는 해석을 인용에 덧붙였습니다. 부정확한 것은 부주의함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문답자가 그 단락이 제시하는 것과 다른 의미로 인용을 했을 때에는 단순히 조사과정에서 실수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겁니다. 이런 식의 “조사”로 이단이라는 비난이 생긴 것입니다.

문제의 두 문장에 대한 정확한 인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아들은 그 영 안에, 성령은 지금 몸 안에 있다. 그들은 지금 하나 안에 넷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과 몸이다.

이러한 문장이 교회가 지금 신격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결코 아닙니다! 어떠한 고립된 문장의 의미를 결정하려면 반드시 그것이 나온 문맥을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내용의 첫 번째 힌트는 그 장의 제목에 있습니다. 5장의 제목은 “교회의 하나됨”입니다. 이 논의의 내용은 신격의 본성이나 구성 요소가 아니라 교회의 하나됨의 본성입니다. 이 하나됨은 무엇입니까? 질문이 발췌된 부분은 “그 영의 단일성”이란 제목 아래에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하나됨은 그 영의 단일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계속 읽어 가면 세 번째 단락이 “교회의 하나됨은 오직 삼일 하나님이며 세 인격 안에서의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 안으로 분배되어 몸을 형성함”(이탤릭체는 강조)으로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몸을 형성하는 세 인격 안에서의 삼일 하나님이 있습니다. 한 분이 다른 분을 움직이는 주체와 객체입니다. 신격의 네 부분이 있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두 구분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질문에 있는 인용 바로 다음 본문은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삼일 하나님이 어떻게 몸과 하나 됩니까? 오직 믿음과 침례로서 가능하다.”라고 말합니다. 몸이 신격의 부분이라고 들립니까? 아들이 아버지와 그 영과 하나되려면 믿음과 침례가 있어야 합니까? 말도 안됩니다! 분명히 신격의 구성원들 사이의 하나됨이 아닌 다른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성경 문답자의 해석과 다릅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성경 문답자는 분명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한번 그가 성경의 진리의 주관적인 면에서 시야가 짧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이 부분의 요점은 몸의 진정한 하나됨을 체험한 사람에게는 분명한 것입니다. 교회의 하나됨은 그 영의 단일성입니다(엡4:3). 이 “그 영의 단일성”은 몸의 지체들 안에서 그 영의 체험입니다. 우리가 그 영 안에서 살 때 우리는 또한 아버지와 아들을 압니다. 그들이 누리는 하나됨은 그 영 안에 있고 우리 몸의 지체들이 그 영에 참여할 때 우리는 같은 하나됨을 체험합니다. 그 하나됨은 그 영의 단일성입니다. 신격 안의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체험할 수 있고 몸의 지체인 우리 또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단일성 안에 있는 넷입니다. 이것은 정확히 주님이 요한복음 17장 21-22절에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여기서 믿는이들의 하나는 신격의 하나됨과 “같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에베소서 4장에서 말한 그 영의 단일성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2절은 계속해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합니다. 몸 안에서의 우리의 하나됨은 삼일 하나님이 누리시는 하나됨인 그 영 안에서의 체험입니다! 이 안에서 우리는 하나 안에 있는 넷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경우라도 우리가 신격의 한 부분이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 문답자가 이 깊고 주관적인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내용에 맞지 않는 그의 해석을 더하고 우리를 이단이라고 비난하는 곳에 잘못 사용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이것은 성경 문답자의 무책임한 왜곡의 한 예일 뿐입니다.

우리가 삼일 하나님의 바로 그 하나됨인 그러한 하나됨을 체험할 수 있음으로 인해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이 하나됨은 교리적인 동의나 단순한 조직적인 단일성 이상입니다. 이 하나됨은 그 영의 체험의 달콤하고 누릴만한 결과입니다. 이 하나됨이 얼마나 귀한지요! 우리는 그러한 하나됨의 누림을 위하여 시편 기자와 함께 주님을 찬양합니다(시133).

이 연속물 안의 다섯 기사 중 첫 번째 기사입니다.

틀린 인용과 허위 진술

지난 몇 주 동안 성경 문답자(the Bible Answer Man)는 윗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를 공격했고 그들이 모든 종류의 이단적인 가르침을 가르친다고 거짓 비난했습니다. 그가 결코 답변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윗트니스 리의 인용들과 틀린 인용들이 그의 반대의 핵심입니다. 사실상, 그가 공격했던 항목들은 The Register 신문에 지난달 공개적으로 상세히 답변되었고 분석되었습니다. 이러한 거짓 비방들에 답하며 지방교회에 있는 이들이 그에게 질문을 했는데 이제까지 그는 실제 질문들을 회피하는 전통적이고 틀에 박힌 가르침들(traditional formulistic teachings)로 답해왔었습니다.

그 동안 쓰여진 모든 것들을 무시하는 듯이 성경 문답자는 계속해서 같은 비난 내용들을 방송했습니다. 그가 사용한 인용들은 철저하게 문맥의 내용에서 고립되었으며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던 의미들을 전달하였습니다. 보통 청취자들은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에 인용문이 윗트니스 리의 관점을 그대로 전달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것은 정반대입니다. 이것이 조사(research)를 잘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인지는 오직 성경문답자만이 알고 있습니다.

이 중 주요한 예는 윗트니스 리의 책 “교회의 실제적인 표현”에서 인용하여 지난 몇 주 동안 “하나 안에 넷”이라고 계속 말했습니다. 다시 한번 1977년 10월 29일 토요일에 성경 문답자는 이 단락을 틀리게 인용하고, 잘못 해석함으로 윗트니스 리가 “극단적인 이단”을 가르치는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방송에서는 오만한 확신을 갖고 인용을 했지만, 누구라도 그 책을 읽었다면 43페이지에서 사실상 의미하는 것과 인용된 것은 언뜻 비슷하게 보이지만 43페이지의 전체 내용을 비교해보면 그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성경 문답자: “여기서 인용을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주님은 그 영이고, 그 영은 바로 그 삼일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성령은 지금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성령이 되셨습니다. 성령은 삼일 하나님입니다. 다시 한번, 그들은 지금 하나 안에 넷입니다. 이것을 보셨습니까? 하나 안에 넷,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몸. 대문자 B가 쓰였습니다. 몸은 교회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질문자: “그것이 그들이 노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문답자: “그것이 그들이 노리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1970년의 윗트니스리의 소책자, 교회의 실제적인 표현 43페이지에서 직접 인용한 것입니다. 지방교회 사람들이 듣고 있을 경우, 여러분의 인도자는 성경을 반대하여 말하고 심각한 이단을 가르칩니다. 그 이단은 셋이 아닌 넷,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이단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되셨고, 아들은 성령이 되시고, 성령은 교회가 됩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전적으로 허튼 소리입니다.”

이 점을 완전히 틀리게 인용했을 뿐 아니라 그는 더 형편없는 해석을 인용에 덧붙였습니다. 부정확한 것은 부주의함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문답자가 그 단락이 제시하는 것과 다른 의미로 인용을 했을 때에는 단순히 조사과정에서 실수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겁니다. 이런 식의 “조사”로 이단이라는 비난이 생긴 것입니다.

문제의 두 문장에 대한 정확한 인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아들은 그 영 안에, 성령은 지금 몸 안에 있다. 그들은 지금 하나 안에 넷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과 몸이다.

이러한 문장이 교회가 지금 신격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결코 아닙니다! 어떠한 고립된 문장의 의미를 결정하려면 반드시 그것이 나온 문맥을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내용의 첫 번째 힌트는 그 장의 제목에 있습니다. 5장의 제목은 “교회의 하나됨”입니다. 이 논의의 내용은 신격의 본성이나 구성 요소가 아니라 교회의 하나됨의 본성입니다. 이 하나됨은 무엇입니까? 질문이 발췌된 부분은 “그 영의 단일성”이란 제목 아래에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하나됨은 그 영의 단일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계속 읽어 가면 세 번째 단락이 “교회의 하나됨은 오직 삼일 하나님이며 세 인격 안에서의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 안으로 분배되어 몸을 형성함”(이탤릭체는 강조)으로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몸을 형성하는 세 인격 안에서의 삼일 하나님이 있습니다. 한 분이 다른 분을 움직이는 주체와 객체입니다. 신격의 네 부분이 있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두 구분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질문에 있는 인용 바로 다음 본문은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삼일 하나님이 어떻게 몸과 하나 됩니까? 오직 믿음과 침례로서 가능하다.”라고 말합니다. 몸이 신격의 부분이라고 들립니까? 아들이 아버지와 그 영과 하나되려면 믿음과 침례가 있어야 합니까? 말도 안됩니다! 분명히 신격의 구성원들 사이의 하나됨이 아닌 다른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성경 문답자의 해석과 다릅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성경 문답자는 분명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한번 그가 성경의 진리의 주관적인 면에서 시야가 짧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이 부분의 요점은 몸의 진정한 하나됨을 체험한 사람에게는 분명한 것입니다. 교회의 하나됨은 그 영의 단일성입니다(엡4:3). 이 “그 영의 단일성”은 몸의 지체들 안에서 그 영의 체험입니다. 우리가 그 영 안에서 살 때 우리는 또한 아버지와 아들을 압니다. 그들이 누리는 하나됨은 그 영 안에 있고 우리 몸의 지체들이 그 영에 참여할 때 우리는 같은 하나됨을 체험합니다. 그 하나됨은 그 영의 단일성입니다. 신격 안의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체험할 수 있고 몸의 지체인 우리 또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단일성 안에 있는 넷입니다. 이것은 정확히 주님이 요한복음 17장 21-22절에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여기서 믿는이들의 하나는 신격의 하나됨과 “같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에베소서 4장에서 말한 그 영의 단일성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2절은 계속해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합니다. 몸 안에서의 우리의 하나됨은 삼일 하나님이 누리시는 하나됨인 그 영 안에서의 체험입니다! 이 안에서 우리는 하나 안에 있는 넷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경우라도 우리가 신격의 한 부분이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 문답자가 이 깊고 주관적인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내용에 맞지 않는 그의 해석을 더하고 우리를 이단이라고 비난하는 곳에 잘못 사용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이것은 성경 문답자의 무책임한 왜곡의 한 예일 뿐입니다.

우리가 삼일 하나님의 바로 그 하나됨인 그러한 하나됨을 체험할 수 있음으로 인해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이 하나됨은 교리적인 동의나 단순한 조직적인 단일성 이상입니다. 이 하나됨은 그 영의 체험의 달콤하고 누릴만한 결과입니다. 이 하나됨이 얼마나 귀한지요! 우리는 그러한 하나됨의 누림을 위하여 시편 기자와 함께 주님을 찬양합니다(시133).

이 연속물 안의 다섯 기사 중 첫 번째 기사입니다.

유대주의와 카톨릭과 개신교에 관하여

성경 문답자는 위트니스 리의 말인 “유대교는 사탄적이고, 카톨릭은 귀신적이고, 개신교는 그리스도가 없다”를 계속 인용하며 위트니스 리가 그렇게 명백하고 대담하게 정죄하는 말을 했다고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성경 문답자는 위트니스 리가 그러한 말을 하는 성경적인 기초와 이에 관련된 내용은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러한 진술들을 뒷받침하는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사실들로부터 근거를 제시해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고려할 때 반드시 사람들과 조직을 구분해야 합니다. 확실히 우리 주님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지만 그분은 믿는이들이 관련된 어떤 특정한 것들을 미워하시며 심판하실 것입니다(계2:5-6, 14-16, 20-23, 18:4-8).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따라 이러한 종교적인 조직들을 정죄하지만 그 안에 있는 믿는이들은 정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카톨릭과 개신교 안에 진정으로 거듭난 믿는이들이 많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종교적인 조직에 있다고 해서 그들이 거듭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그리스도인 삶의 진보에 있어서 큰 장애물이며 주님께는 지극히 모욕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계속해서 “회개하라”(계2:5, 16, 22, 3:3, 19) 그리고 “나오라”(계18:4)고 부르십니다.

유대교의 상태

계시록 2장 9절과 3장 9절에서 주님은 “사탄의 회”가 “유대인이 아니면서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회당(Synagogue)의 일원들은 육체로는 유대인들이지만 영 안에서는 아니었습니다(롬2:28-29). 단지 육체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으로는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마3:9, 롬9:7-8). 그러므로 주님은 계시록에서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당에서 그들은 고집스럽게 그들의 옛 관습과 외적인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대치된 그들의 옛 종교를 포기하지 않고 생명과 은혜인 하나님의 길에 대적하여 사탄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회당들은 사탄의 통제 아래서 주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마12:9-14, 눅4:28-29, 요9:22, 행2:23, 3:13-15). 그들은 또한 사도들을 핍박했고(행6:9, 13:43, 45-46, 50, 14:1-2, 19, 17:1, 5-6, 13) 교회들을 핍박했습니다(계2:9, 3:9).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회당들은 복음을 거부하며 예수의 이름을 미워하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칩니다. 이러한 반대 때문에 주님은 그들을 사탄의 회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대교가 사탄적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주님 자신의 말씀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카톨릭의 상태

계시록은 또한 카톨릭에 대한 분명한 그림을 보여줍니다. 2장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우상숭배와 간음으로 이끄는 악한 여인 이세벨이 있고, 17장에서 이 여자는 큰 음녀로 가증한 것의 요약(epitome)입니다. 이 여자의 각 방면은 로마 카톨릭의 상황에 부합합니다. 이세벨은 두아디라에 있는데, 두아디라는 향료의 제사 또는 끝없는 제사(미사)를 의미합니다. 또한 행위를 강조하며 로마교황의 가르침이 성경을 대체합니다(2:19-20). 이 설명은 17장에서도 계속됩니다: 세상 임금들과의 부정한 연합(2절), 자주 빛과 붉은 빛의 옷(4절), 겉으로는 거룩(금)하지만 속은 가증함(4절), 많은 진정한 믿는이들이 흘린 피에 죄가 있음(6절), 로마시가 지어진 일곱 산 위에 앉음(9절). 로마 카톨릭과 계시록 17장의 여자의 정체는 알렉산더 히슬랍(Alexander Hislop)이 쓴 ‘두 바벨론’ 이란 제목의 학술논문의 주제입니다. 그가 말하길,

빛 비춤 받은 개신교인이라면 “일곱 산 위에 앉아 있고” 이마에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고 쓰여진 그 여자와 로마 배교를 동일시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p.1-2).

그러면 모든 방면에서 로마가 어떻게 그 이마에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보겠습니다.

카톨릭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경에 대해 말합니다. 이것은 계시록 17장 4절에 있는 귀한 것들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들은 단지 꾸민 것들로서 카톨릭의 진정한 본질이나 상태를 나타내지 않고 외관만을 나타냅니다. 카톨릭의 진정한 상태는 불경스럽고 더럽고 가증하고 부도덕하고 귀신들과 악한 영들이 가득합니다(17:3-5, 18:2). 카톨릭의 두 가지 유명한 실행들인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는 것은 심지어는 “귀신들의 가르침”이라 불리웁니다(딤전4:1, 3). 주님 자신도 이 조직을 귀신적(demonic)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향한 우리의 태도는 반드시 외관에 기초하지 않고 그분의 말씀 안에서 나타낸 대로 주님의 평가에 기초해야 합니다.

교회 역사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수많은 그리스도 안의 참된 믿는이들을 죽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더욱이, 카톨릭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수세기 동안 어두움과 무지와 빈곤 안에 가두었던 미신적이고 이교도적인 실행 등이 합병된 조직의 가해자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한 분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금해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직이 귀신적이라고 불리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까?

개신교의 상태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님이 말씀하시길,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계3:20). 여기에 사실상의 교회가 있지만 주님은 그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바깥에서 들어가시려고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교회가 일(works)이 있고 부요하며 필요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그리스도의 임재가 없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임재와 권위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들이 여전히 그분의 이름 안에서 행해집니다. 여러분은 아마 진실로 구원받았을지 모르나 그리스도의 임재나 권위의 실제가 없는 교회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교사들이 인정하듯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이 돌아오시기 전인 마지막 때의 교회의 그림입니다.

매 주마다 수천 개의 교회에서 사람들은 앉아 정치와 도덕과 사회문제에 관한 설교를 듣지만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구원받고 양육 받아야함은 결코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그리스도 없는 개신교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칭된 많은 곳들이 사교적인 클럽이나, 일주일에 한번씩 방문하는 사람의 양심을 단지 진정시키는 의식적인 실행으로 하락했습니다. 그곳에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심지어는 일부 주님의 진정한 자녀들은 주님과 초대 제자들과는 거리가 먼 실행들을 채택했습니다. 이 둘을 비교할 때, 주님이 그 이후 갑자기 바뀌셨거나, 아니면 그분은 그들이 하는 것 안에 계시지 않는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싼 옷을 입고 큰 집에 살며 매주 마다 돈을 요구하는 목사가 한 벌의 옷밖에 없고 머리 둘 곳도 없던 갈릴리의 사람에게 비교될 수가 있습니까? 그곳에 그리스도가 있습니까? 할리우드의 방법과 외양이 범람하는 개신교가 어떻게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의 단순한 말과 생명을 반사하겠습니까? 그리스도가 거기에 계십니까? 만약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거기 계시다면, 사람들이 새 옷을 자랑하며, 졸면서 한 시간 동안 듣고 있고, 끝나기가 무섭게 담배를 피며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야기를 나누며, 서둘러 집에돌아와서 텔레비전을 보겠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 없는 개신교”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토저(A.W. Tozer)가 쓴 "관심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란 책을 생각해 봅시다. 그 글의 제목은 “교회들 안에서 쇠약해지는 그리스도의 권위”입니다(pp.163-172)

내 비통은 전세계적으로 교회들 사이에서 만연되고 있는 상태때문이다.. 내 부담의 이유를 말하겠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는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을 부르는 단체 사이에서 거의 권위가 없다...일반적으로 개신 교회들을 의미하는데, 주님과 그분의 사도들의 영적 자손이라고 가장 크게 항의하는 자들인 복음주의자들도 포함된다. 명목상 그분은 만유 위에 머리이시지만 각 결정 단계마다 다른 사람이 결정을 내린다...예수님의 통치권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그렇게 잊혀지지 않았지만, 그 통치권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기쁜 종교적인 감정의 고조 안에서 편안하게 해방될 수 있는 찬송가로 격하되었다...그[그리스도]는 사람들을 갱생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영적 정신과 의사의 한 종류라고 널리 추천되었다...물론 이 이상한 그리스도는 신약의 그리스도와 아무 관련이 없다...우리 주님의 권위가 감퇴된 이면에는 많은 원인들이 있다. 내가 두 가지만 말해보겠다. 하나는 관습이 오랫동안 지속된 종교 집단 안에서의 전례와 전통이다...두 번째 원인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의 지성주의의 부활이다. 내가 상황을 정확하게 감지한다면, 이것은 배웠다는 명성을 갖기 위한 태도이지, 배우려는 태도가 아니다. 이것 때문에 제대로 알아야 할 좋은 사람들이 대적과 협력하는 위치에 놓여있다.

토저는 그의 책에서 오직 자백과 회개만이 오늘날 교회들 위에 있는 “저주를 지울 수 있다”라고 말하며 결론을 내렸습니다.

결 론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특정 그룹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과 변화를 체험하길 소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알기를 방해하는 제도를 거절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유대교는 사탄적이고, 카톨릭은 귀신적이고, 개신교는 그리스도가 없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기사는 다섯 개의 기사 중 두 번째입니다.

믿는이가 로마 카톨릭에 남아 있어야 합니까?

1977년 10월 29일에 성경 문답자는 로마 카톨릭과 믿는이와 로마 카톨릭의 관계에 대하여 몇 가지를 제시했습니다.

로마 카톨릭 신도인 한 여자 분이 전화를 하여 로마 카톨릭에 대한 그의 태도를 물었습니다. 다음은 그의 대답을 발췌한 것입니다:

내가 쓰거나 말한 것 중에서 어느 것도 반카톨릭적인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겁니다. 카톨릭 신학에 대한 비평은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의 인격을 비평하는 것과 신학에 대하여 당신과 다른 견해를 갖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에 대한 테입이 있습니다. 나는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매우 깊은 인상이 있습니다. 나는 카톨릭 학교에서 교육받고 졸업했습니다.
나는 반카톨릭이 아닙니다. 나는 카톨릭 신학의 어떠한 분야에 대해 반대하지만 카톨릭은 허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그것은 단지 신학에 관한 의견의 차이입니다.
같은 방송에서 잠시 후에 성경 문답자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카톨릭 교회에 남아있어야 하는 지에 대하여 묻는 어떤 여자 분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가 대답하기를:
네, 저는 당신이 남아있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카톨릭교회에서 증인으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더 증거 할수록 더욱 더 성경에 가까워지고 기능을 발휘하기가 더욱 힘들어 질 것입니다. 결국에 당신은 떠밀릴 것입니다...나라면 그들이 나를 떠밀 때까지 그곳에서 증거할 것입니다.

한 면으로 성경 문답자는 10월 15일 방송에서 그가 교황 무오설과 성직자들의 금욕과 화체설과 연옥과 같은 교리들에 대하여 카톨릭 교회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10월 29일 방송에서 2주 전에 그의 말들로 마음이 상한 전화 질문자에게 대답할 때, 그는 이러한 차이들은 단지 “다른 관념”, “신학에 대한 다른 의견”들이라고 희석시켰습니다. 사실상, 성경 문답자와 로마 카톨릭의 다른 의견들은 하찮게 보여 두 번째 전화 질문자에게는 그러한 기능이 불가능해질 때까지 카톨릭 교회에 남아서 계속해서 기능을 발휘하라고 격려했습니다.

단지 의견의 문제를 넘어섬

로마 카톨릭과 정통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차이는 단지 의견의 문제입니까?

유명한 성경학자이며 성경 문답자 본인의 스승이었던 도날드 그레이 반하우스(Donald Grey Barnhouse)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더 히슬랍(Alexander Hislop)이 쓴 두 바벨론이란 책표지의 서문에서 그가 말하기를:

로마 이단의 거의 모든 실행들은 이교도에서부터 왔다...그 조직의 중심은 사탄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오스왈드 샌더스 (J. Oswald Sanders)는 그의 책 ‘이단들과 주의들’에서 몰몬이나 여호와의 증인이나 크리스챤 싸이언스(Christian Science)와 같은 현대 이단들을 드러내고 반론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룬 첫 번째 이단은 로마 카톨릭입니다. 그가 말한 이유는:

로마 카톨릭이 그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영향력이 있기에 우리는 이단들의 리스트중 가장 앞에 로마 카톨릭을 둔다...로마 카톨릭과 개신 교회들은 지옥과 하늘이 멀리 떨어진 것처럼 다른 목표로 이끄는 완전히 근본적으로 서로 상충되는 다른 종교들이다(p.20)

로마 카톨릭에 관한 장에서 샌더스는 “성경을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이성적으로 로마 카톨릭이며 로마 카톨릭이 될 수 있는 일곱 이유들”을 언급했습니다.

그의 일곱 이유 중에 로마 카톨릭의 “구원에 필요한 상태로서 교황에게 대한 복종 요구”가 있습니다. 그는 교황 보나피스 8세(Bonaface VIII)를 인용했습니다:

로마 교황에게 모든 인류가 순복하는 것이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선포하고 확증하고 밝히고 선언한다.

샌더스는 계속해서 교황 파이어스 9세(Pope Pius IX)를 인용했습니다:

비록 내가 알맞지 않지만 나 혼자만이 사도들의 계승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다...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 후에 샌더스가 지적하길 “로마주의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많은 중재자들을 허락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리고오리(Liguori)의 책 마리아의 영광들을 인용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의 이름으로 기원하는 것보다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구할 때 더 빠르게 응답을 얻는다.
만약 내 구속자가 내 죄로 인하여 나를 부인하고 그의 거룩한 발 밑에서 나를 쫓으면 나는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인 마리아 앞에 내 자신을 던질 것이다...그녀가 내 용서를 획득할 때까지.
오 순결한 처녀여, 우리의 죄로 화가 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우리를 마귀의 권세에게 넘겨주는 것을 막아주소서

성 보나벤쳐(Saint Bonaventure)를 인용했는데, 그가 말하길:

마리아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녀의 독생자를 주셨다.

이것이 단지 신학에 대한 의견의 차이입니까? 아닙니다. 이것들은 가장 수치스럽고 가증한 이단들입니다(벧후2:1). 이것은 믿음과 실행들의 귀신적인 조직으로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받는 것을 막습니다. 하지만 성경 문답자는 로마 카톨릭이 이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똑같이 혐오감을 일으키는 인용 가능한 부분들이 많지만 이 정도면 로마 카톨릭이 정통 믿음의 또 다른 가지가 아님을 보여주는데 충분합니다: 로마 카톨릭은 이단보다 심합니다. 그리고 모든 정통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카톨릭을 그렇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에 대한 성경적인 태도

성경 문답자와 달리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로마 카톨릭에 대한 태도에 대해 절대적입니다. “내 백성아 그곳에서 나오라” 라는 음성이 하늘로부터 나왔습니다(계18:4). 성경에 따르면 로마 카톨릭은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것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습니다(계18:2). 어떤 하나님의 자녀가 그러한 곳에서 머물기를 갈망하겠습니까?

성경 문답자와 달리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로마 카톨릭에 대한 태도에 대해 절대적입니다. “내 백성아 그곳에서 나오라” 라는 음성이 하늘로부터 나왔습니다(계18:4). 성경에 따르면 로마 카톨릭은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것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습니다(계18:2). 어떤 하나님의 자녀가 그러한 곳에서 머물길 갈망하겠습니까?

사도가 말하길, “어찌 빛과 어두움이 사귀며...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6:14,17)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호합니다: 어떠한 그리스도인도 로마 카톨릭에 남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개인적인 간증

나도 카톨릭 교회 안에서의 개인적인 체험이 있습니다. 나는 이탈리안 카톨릭 가족의 일곱 아이들 중 첫째였습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고백하러 갔었고, 로자리오의 기도를 말했고,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다 십대였을 때, 어느 날 몇몇의 친구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인생에서 어떠한 일을 하셨는가를 교통할 때 하늘로부터 빛을 보았습니다: 나는 거듭났습니다.

이년 후에 나는 내 동생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고 결국 내 온 가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처음에 부모님들께서 카톨릭 카리스마 운동 안에서 기능을 발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들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체험은 결국은 멈췄습니다.

오늘날 내 온 가족은 로마 카톨릭을 나왔습니다. 하나 하나씩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받아 우리가 일생동안 배운 것이 진리가 아님을 보았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멀리 떨어져서 살지만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하나입니다.

오늘날 나는 어떤 그리스도인 교사도 로마 카톨릭에 남아있으라고 말하지 않았음을 감사합니다.

세계 교회주의는(Ecumenism)길이 아님

확실히 성경 문답자는 로마 카톨릭의 이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그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않을까요? 아마도 세계 교회주의적인 하나를 갈망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진리의 사역자는 그의 말을 듣는 자들에 의해 영향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저들은 세상에 속한 것이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문제에 관계된 사람들도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면(엡6:6),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 그러해야 하겠습니까? 어느 진정한 하나님의 선지자가 사람들의 찬미를 구하였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반드시 결과를 상관치 말고 선포되어야 합니다. 만약 로마 카톨릭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것이 하나님의 참된 교회라면 우리 모두는 그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로마 카톨릭이 모든 음녀들의 어미라면 우리는 카톨릭을 버리고 그곳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반드시 로마 카톨릭을 미워해야 하지만 카톨릭 신자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죄인에게 그의 죄를 빛 비추어 주는 것이 사랑의 행위인 것처럼,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로마 카톨릭을 버리도록 진정으로 권면하는 것이 사랑의 행위입니다. 참으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가장 큰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시도록 몰몬과 여호와의 증인과 크리스챤 사이언스를 위해 기도한다면 로마 카톨릭을 위해서는 얼마나 더 기도해야 하겠습니까?(행26:18)

주님이 우리에게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영”(딤후1:7)을 주사 기도하여 우리의 모든 형제자매들이 진리를 충만히 알도록 돕기 원합니다.

이 시리즈에 대한 다섯 기사 중에 세 번째 기사입니다.

연합(mingling)에 관한 진리

연합은 하나님과 사람의 내적 연결을 설명하는 성경적 용어입니다. 이 연결의 본성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다음 구절들의 실제를 체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주는 영이시니”(고후3:17), “나는 주께서 네 영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딤후4:22),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17). 연합에 관한 진리는 이 세 구절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 주님과 그 영의 동일함: 고린도 후서 3장 17절에 따르면 주님은 그 영과 동일시됩니다. 이 동일함은 사도 바울이 마음 안에서 주님을 체험하는 내용에서 썼습니다. 마음은 16절에서 주님께 돌이켜지고, 그 다음에 18절에서 주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 돌이킴과 바라봄은 우리가 주님으로 동일시된 그 영인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는[헬라어: 메타모포시스]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 동일함의 이유는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형이상학적인 용어로 정의되지 않고 인격으로 체험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가고 있는 동안 그분 자신을 우리 존재 안에서 연합하고 계십니다. 이 영적 변화는 주님, 곧 그 영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주 예수님이 성육신으로 육신이 되시어(요1:14) 사람을 위하여 구속을 성취하러 오시고, 지금은 부활 안에서 생명 주는 영이 되셔서(고전15:45) 그분의 생명으로 사람 안에 스며들고 그분 자신을 영으로서 우리의 영과 연합하십니다. 사실상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육신 안에 계셨던 그리스도의 땅에서의 삶의 반영과는 대조를 이루는, 생명 주는 영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체험 으로 완전히 점유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말하길,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그리스도 안에”나 “주 안에서”라는 문구가 바울의 글에서 164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은 바울과 주님과의 내적 연결의 친밀한 체험을 강하게 나타냅니다. 이 연결은 바울의 체험 안에서 주님이 그 영이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성 바울의 그리스도의 관한 개념' (pp.117-118, 121-122)의 저자인 데이빗 소머빌(David Somerville)은 에딘버그(Edinburgh) 프리 처치 칼리지(Free Church College)의 윌리암 커닝햄(William Cunningham) 강사직에(1897) 있었는데 그가 이 진리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단지 하나님의 영을 그리스도의 영과 동일시한 것뿐 아니라 그 둘을 그리스도의 바로 그 인격과 동일시했다. 우리는 “주는 영이시다”라고 읽었고 다시 한번 “그 영인 주님에 의해 같은 형상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읽었다. 이 단락에서 사도의 목적은 분명히 그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이라고 알았던 그분이 영으로서 그들의 삶 중심에서 신성한 능력으로 사람들을 다스리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있는 것과 “그 영 안에 있는 것”은 같은 것이고 사도의 사상 안에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은 실질적으로 동의어이다. 부활의 때에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의 이 실질적인 동일함은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의 연결의 근거와 이유로서 바울의 서신서에서 묘사된 그리스도인 생활의 체험의 독특한 특색이며 그것이 독창적인 빛 안에서 그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상을 굳게하였다. 그분의 영이 그들 안에 있고 그들의 생명의 근원이고 그분의 인격이 그 영과 참되게 하나이기 때문에, 그분 자신은 그들 안에 있고 그들 안에 살고 마찬가지로 그들도 그분 안에 있고 그분 안에서 산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사도가 믿는이의 속 생명을 나타냄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사용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영이며 뉴마이신 그분과의 연합으로 그분이 그들의 삶의 원칙이 되고, 그분이 그들 모두와 하나 되어 가장 깊은 개인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그 결과 그분이 그들의 활동을 형성하고 결정하며 깊은 개인적인 관계를 재생산해낸다. 믿는이들은 그들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를 얻음으로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다시 살 수 있게 된다. 믿는이들은 단지 그리스도가 그의 생명을 그들의 안에서, 또는 그들에 의해서, 다시 살게 하는 또는 믿는이들의 육체 가운데 새롭게 살도록 허락하는 대행자에 불과하다.

2. 주님이 우리의 영과 함께 하는 곳: 연합에 관한 진리는 디모데 후서 4장 22절의 바울의 마지막 말에서 더욱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주께서 네 영과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이 구절은 특별히 사람의 영과 함께 하는 고린도 후서 3장 17절에서 영이신 주님의 위치를 지적합니다. 믿는이 안에서 그리스도가 내주 하시는 곳은 사람의 영입니다.

사람의 영은 신약에서 75번이 넘게 언급되었고 바울의 글에서는 46번이나 나옵니다. “너의 영”(딤후4:22)과 “그의 영”(고후7:13)과 “내 영”(고전16:18)과 “우리의 영”(롬8:16)은 모두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하나님으로 난 우리의 존재의 부분을 가리킵니다(참조. 요1:12-13, 3:6).

우리의 눈이나 입이나 팔이나 다리가 우리의 물질적인 몸에 속해 있는 많은 지체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은 우리의 존재에 속한 기관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영에 대하여 말할 때 성경은 “너의”나 “그의”나 “우리의”라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물질적인 부분들과, 양심과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심리적인 부분들처럼 우리의 영도 우리 사람의 존재의 구성의 부분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 존재의 다른 부분들을 관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을 관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고린도 전서 14장 32절은 “신언하는 자들의 영이 신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한국어 성경: 예언)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영의 기관을 사용하여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기도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냄으로 주님에 대한 우리의 체험을 활성화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부터 20절까지 헬라어의 문자 그대로의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영 안에서 충만하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을 말하는 [동안], 주님께 너희 마음 안에서 노래를 하며 만드는 [동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하나님과 아버지께 모든 것에 대하여 항상 감사를 드리는 [동안]”. 우리가 말하고 노래하고 감사하는 동안 우리의 영은 사용되어 주님을 접촉하고 그분으로 충만해 집니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 안에서 그분 자신의 위치를 정하시는 곳은 우리의 영입니다. 우리의 영안에서 주님을 찾아 하루 종일 그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거듭난 사람의 영은 주님이 우리 안에서 사시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은 그 영이신 주님과 연합되었습니다. 두 영들은 하나로 연합되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내적 연결로서 하나님의 모든 자녀 안에서 존재합니다.

3. 한 영으로서의 주님과의 연합: 연합에 관한 진리는 고린도 전서 6장 17절에 분명히 나타나있습니다:“주와 합하는 자는[헬라어: 그 자신을 연결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이 구절에서 언급된 연결은 두 영이 함께 연결돼 한 영이 되는 그러한 본성의 것입니다. 신성한 영과 사람의 영의 연합은 체험의 영역 안에서 존재하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을 주님께 연결시키는 체험입니다.

이 시점에서 주님에게 연결된 우리 사람의 영의 기관이 적어도 네 단계가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먼저, 이것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창2:7, 잠20:27, 스12:1). 둘째로, 죄로 인하여 죽었습니다(창2:17, 롬5:12, 엡2:1). 셋째로,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살려졌고 다시 태어났습니다(요1:12-13, 3:6). 넷째로, 우리가 주님께 연결되는 체험 안에서 그 영이신 주님과 연합되었습니다(고전6:17, 롬8:15-16).

사람의 영과 그 영이신 주님과의 연합의 단계에서 두 영의 하나됨의 본질은 그들 중 어느 것의 독립적인 존재를 깨뜨리지 않았음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 둘은 그들 안에 구별된 존재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영의 연합의 체험 안에서 성경이 “한 영”이라고 설명하는 상호 침투가 있습니다.

이러한 연합의 종류의 예는 출애굽기 3장 2절의 불타는 가시떨기 나무 가지에서 발견됩니다. 모세가 본 나뭇가지는 불로 침투되었지만 소모되지 않았습니다. 나뭇가지는 나뭇가지로 남아있었고 불은 불로 남아있었지만 이 두 실체들은 서로 안으로 들어와 서로 서로를 충분히 침투했습니다. 불과 나뭇가지의 연합이 있었고 나뭇가지와 불의 연합이 있었지만 각각의 구분됨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전서 6장 17절에 따라 두 영의 연합을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그 영이신 주님은 나뭇가지 안에 거하시는 불로 비유될 수 있고 우리 사람의 영은 나뭇가지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불과 나뭇가지 모두 다 서로 연합하고 상호 침투하는 동안 두 가지 것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존재에 따르면 그들은 둘이었지만 체험에 따르면 그들은 하나였습니다. 그러한 체험으로 할렐루야!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오늘날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실 뿐만 아니라(롬8:34) 생명 주는 영으로서 우리와 지속적인 접촉을 할 수 있도록 계십니다. 이것은 체험의 단계에서 우리가 그 영으로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동일시되어야 함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종류의 깨달음이 여러분의 그리스도인 삶에 미치는 영향은 중요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바울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여러분의 존재를 갖게 합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참으로 그분의 바로 그 생명 안에서와 여러분을 통해서 살고 계신다는 신선한 믿음을 주입시켜줄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 4장 22절의 실제를 알기 때문에 여러분의 체험 안에서 주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나는 주께서 네 영과 함께 계시길 구하노라”. 여러분이 먼저 여러분 자신을 주님께 연결하여 “한 영”으로서 그분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단지 여러분 안에 거하실 뿐 아니라 여러분 안에서 자라시고, 심지어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채워지도록 여러분의 마음 안에서 거처를 정하시는 분과 연합된 사람으로서 여러분 자신을 생각하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연합에 관한 진리입니다.

이 시리즈에 있는 다섯 개의 기사 중 네 번째 기사입니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에 관한 진리

18세기의 저작에서 윌리암 로(William Law)가 말하길, “하지만 교회는 성경말씀이 진리임을 믿고 믿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로 가득차 있다. 그들은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를 믿지만 그분을 개인적으로는 알지 못한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그들의 생각에는 흠 없는 교리이지만, 그들의 삶에서 죄의 권세를 이기거나 다른 이들을 그리스도께 회심시키기에는 그분의 현저한 능력이 텅비어 있다.”(그 영의 능력, p.103)

그리스도인의 실상을 목격한 정직한 사람이라면 윌리암 로의 말이 그가 그것을 썼을 때나 오늘날이나 똑같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이 기사에서 우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약하고 성숙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상태에 대한 가장 큰 이유를 밝히겠습니다. 상황과 치료법을 이해하도록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인에 대한 성경적인 그림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둘째로 오늘날 기독교의 상황을 간단하게 보겠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문제점을 말하겠습니다. 넷째로,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답을 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간략한 성경적인 그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고(요3: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창조로 만들어진 사람입니다(고후5:17). 그리스도는 지금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내주 하십니다(골1:27).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한 영입니다(고전6:17).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고, 지금 그 안에 계시며, 영광의 소망이십니다(골1:27). 아버지 하나님은 어두움의 왕국(사탄의 왕국)에서 그리스도인을 구출하시어 아들의 왕국으로 옮기셨습니다(골1:13). 그리고 영적 유기체의 지체로 만드셨습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고전12:13, 엡1:22-23),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8) 라는 헌신을 말하게 부르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그러므로 세상의 미움을 받습니다(요17:14). 믿는 이들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됩니다(요일2:15-17).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약1:27), 세상 물질에 매달리지 아니하고(요일3:17),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합니다(고전7:31). 세상의 영과(고전2:12) 세상의 지혜와(3:19) 세상의 풍습(7:31)이나 세상의 정욕(딤2:12)에 복종치 않습니다. 오히려, 신성한 본성에 참여함이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할 준비가 믿는 이들에게는 마련되어 있습니다(벧후1:4). 말씀의 젖과 구원에 이르도록 자람으로 신성한 본성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벧전2:2). 그러므로, 믿는 이는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되어(롬12:2), 이 어그러지고 잘못된 세상에 대하여 흠없고 정직하고 빛나는 간증이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에 대하여 분명한 기록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온 일생은 그리스도와 교회였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통과, 떡을 떼고 기도함과, 집집마다의 교통과, 끊이지 않는 복음전파를 계속했습니다(행2:42-47, 4:23-37, 5:42).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

오늘날 우리는 생기 없는 기독교가 수많은 조직들로 나뉘고 세상과 연합 했음을 봅니다. 형식과 의식들과 화려한 건물들과 성가대와 독창과 사중주와 락 밴드와 드라마와 성금 모금을 위한 연회와 할로윈(Halloween)을 위한 귀신 집들로 묘사되는 기독교를 보며 완전히 놀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 아침 “거룩한 시간” 후 서둘러 집으로 와서 텔레비젼을 보며 스포츠에 열광하며 껍데기뿐인 우상 앞에서 보냅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신 목적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이 그들의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것 같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어느 날 그들에게 왜 그들이 그들의 시간을 덧없이 보냈는지에 관하여 물으실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시간과 돈을 쾌락에 빠지고 근심과 걱정을 하며 보내는데 사용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을 부패한 불신자들과 구분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완전한 죄의 일에 관련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데 온전히 소모되고 있습니다(마24:38). 거기엔 성숙은 거의 없고 세상과의 분별도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더 분명한 것은 세상의 통계에서조차도 종교적인 조직 안에 많은 이름들이 올려져 있지만 그 중에서 많은 이들이 “거듭나지” 않았고, 그러므로 결코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급된 문제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약하고 세상적이고 성숙하지 않고 분열적인 상황을 만들려고 하나님의 대적, 사탄이 어떠한 일을 했습니까?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주관적인 체험을 베일로 가렸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주관적인 체험은 믿는 이들 안에서 내주하는 그리스도와 직접적이고 개인적이고 의식적이고 상호의 영향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인 진리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지식이 있지만(교리), 진리라던가 아니면 더욱 정확하게 진리이신 하나님에 대한 주관적인 체험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습니다. 신학적인 교육을 받았던 그렇지 않던 그들은 그들의 성경 지식이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과 같다는 착각 아래 꿈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주 하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에 대한 교리를 갖고 있지만 정직하다면, 그러한 체험이 사실상 그들의 속 생명 안에 없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말할 때, 어떤 이들은 즉각 “우리는 체험을 관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관심한다...체험은 추상적이다...체험을 의지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온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커다란 주관적인 체험 없이는 누구의 존재도 완전히 변화받을 수 없음을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의 내적 탄생과 생명의 본성 전체 안에 구원이 있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반드시 이 그리스도에 대한 주관적인 체험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답변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은 하나님을 체험하지 않는 한 쓸모 없고 좌절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체험의 연속으로 구성됩니다. 사과파이 한 조각에 관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먹지 않는 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계시는 우리가 그분을 계시에 따라 체험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는 교리는 알지만 우리 존재 안에 체험이 없다면 얼마나 좌절됩니까!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네”(갈2:20)라는 교리는 알지만 사실상 의식적인 매일의 체험을 가질 수 없다면 얼마나 좌절됩니까! 생각을 새롭게 하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누림이 없다면 로마서 12장 2절의 변화의 대한 지식이 얼마나 쓸모 없는지요!

머리로 아는 교리는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윌리암 로(William Law)가 말하길:

아무도 단지 그리스도에 관하여 역사적으로 말해진 것에 대한 이성적인 동의로 구원의 진리를 알 수 없다. 오직 그분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에 대한 내적 체험으로 복음의 구원하는 능력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실제는 육적이고 유한한 외적인 것들에 있지 않으며, 말로 설명할 수 없고, 그것은 출생과 생명과 영적 운행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소위 교회라 불리는 곳들은 교리들을 세우기 위하여 단지 머리 속에서의 동의로 연결되었습니다. 교회의 명부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는 것이 쉽사리 인정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반드시 새 출생의 주관적인 체험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영으로 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체험입니까(요3:6).

문자의 지식으로는 변화받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은 문자의 사역이 아니라 그 영의 사역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그리스도의 편지였던 믿는이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니...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심비에 한 것이라”(고후3:3). 이 같은 장의 결론은 내주 하시는 영의 내적 체험이 믿는이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7절에 대한 각주에서 요한 이디박사(Dr. John Eadie)가 그리스도의 주관적인 사역으로 인해 영화롭게 됨을 계시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영광은 아직 이르지 않았지만 확실하다...시간 안에서 부분적으로 점진적으로 누리는 것은 하늘에서 온전히 그리고 영원히 소유될 것이다...이러한 영광의 소망에 대한 기초는 그리스도의 성도들 안에 있는 그의 영의 주관적인 역사에 의한다. 믿는이는 하늘을 소유할 뿐 아니라 그것을 위하여 성숙하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교리적인 안전 안에서 안식하지만 그들의 삶은 영의 열매가 없고 신성한 형상이 없고 그들이 말씀의 문자를 알면서도 진리와 능력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오늘날의 교회로서 변화되고 변형되어 영원히 새 예루살렘이 되는 몸을 산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오직 주관적인 체험들의 연속으로 산출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먼저 거듭나야 합니다(요3:6). 새 출생을 따라, 우리는 삼일 하나님 안으로 침례 받아야 합니다(마28:19). 우리는 한 몸 안으로 침례 받았고(고전12:13)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되었습니다(12, 14절).

에베소서 3장 16절부터 21절까지 바울은 믿는 이가 개인적으로 어떻게 변화를 받고 단체적으로 교회가 되는지를 말해줍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체험입니다. 다음은 요한 이디박사(Dr. John Eadie)의 에베소서 각주 243-247페이지에서 인용했습니다:

그분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분 자신의 무한한 충만을 주신다...능력을 사람 안으로 주입하심으로...하나님의 영은 이 격려의 과정의 대행자이다..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사람의 영 안에 자유롭게 들어가실 수 있고, 긍휼의 계획 안에서 그분의 특별한 기능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하늘에 속한 축복들을 마음에 적용하는 것이다..그리고 성전의 디자인으로서 그 숭배의 대상이 그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가 그 마음 안에 거하신다. 이 거처는 단지 그리스도인의 교리로는 설명될 수 없고, 비밀스러운 과장이라고도 할 수 없다.

이 단락은 그 영이 하나님의 영광의 모든 풍성들을 우리 속 사람 안으로 주입하심을 나타냅니다. 그 후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 안에서 거하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모든 기관들은 그분으로 채워집니다. 그리스도가 내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 안에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집니다. 그 후 놀랍고도 단체적으로 “모든 성도들과 함께” 우리는 우리가 영 안에서 건축되는 하나님의 거처의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이해합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주관적인 체험으로 건축될 때 바울은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이라고 의기양양하게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내 교회를 세우리라”하고 말씀하신 날부터 분명히 그분은 그분 자신에 대한 지속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단체적으로 변화될 때까지 그분의 선민들을 이끄셨습니다. 그분이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우리 죽을 몸들의 변형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러면 변화되고 변형된 교회는 영광스러운 신부가 되어 삼일 하나님이 그분의 영원한 거처로 건축해 오신 영원한 성 새 예루살렘이 될 것입니다 .

우리 하나님에 대한 현재의 주관적인 체험과 누림은 오직 영원한 것의 미리 맛봄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인 새 예루살렘에서 완결되었을 때, 거기에는 영원한 마심과 잔치를 위한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 밖에 없습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속하시는 어린 양을 영원한 생명공급으로서 누릴 것이며 생명 주는 영의 생수를 마실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마지막 부름은 주관적인 체험입니다-“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솟는 샘인 이 생명의 물을 우리와 함께 모두가 마시도록 부릅니다.

이 시리즈에 있는 다섯 개의 기사 중 다섯 번째 기사입니다.

 


내용   |    소개   |    요약   |    위트니스 리   |    삼일성
연 합   |    교 회   |    이 탈   |    본 성   |    구 원
성 경   |    실행들   |    이단시비   |    인신공격   |    부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