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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문답자에 대한 답변 (계속됨)

 
 


1월 7일

성경 문답자에게는 세 하나님들이 있다

그의 요한복음 1장 1절의 해석으로 증명됨

성경문답자는 세 하나님들을 믿습니다. 이것은 쉽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라디오와 글을 통한 그의 대중 연설을 철저하게 검토해서 내린 결론입니다. 그는 세 하나님들이 있다고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격렬하게 부인합니다. 하지만 신격에 대한 그의 말들을 철저히 검토해 볼 때 어쩔 수 없는 결론은 그가 사실상 삼신론자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관한 그의 말들을 먼저 검토해 봅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구절에 대하여 성경문답자는 1977년 10월 8일 라디오 방송에서,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말은 말씀이 그분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란 말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철저히 검토되어야 합니다.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하나님은 그 말씀이시더라

하나님이란 단어는 이 구절에서 두 번 나옵니다. 내 질문은 이것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과 두 번째 하나님이 다릅니까? 이것은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말은 말씀이 그분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란 말이 아니다”라는 그의 말로부터 내린 결론입니다. 만약 말씀이 그분과 함께 계시던 하나님이 아니라면, 말씀은 또 다른 하나님입니까? 요한복음 1장 1절의 두 번째 절을 보면 분명히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고 말하고 세 번째 절은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성경문답자에 따르면, 하나님이란 단어는 어떤 경우에는 말씀과 함께 계셨던 누군가이고, 다른 경우에는 하나님이란 단어가 말씀을 의미하지만 말씀이었던 하나님은 말씀과 함께 했던 하나님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뜻은 그가 요한복음 1장 1절에 하나님이라 불리는 두 무리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1977년 10월 5일날, 요한복음 1장 1절에 대한 논쟁을 계속하면서 성경문답자는, “말씀이 그가 함께 했던 바로 그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사벨리안주의로서 신격의 구분과 인격들을 없애는 양태론의 이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그가 성경을 어떻게 읽는지, 특별히 요한복음 1장 1절을 어떻게 읽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성경을 역사적 논쟁이란 색안경을 끼고 봅니다. 그가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 자주 보입니다. 우리 앞에 구체적인 예가 있습니다. 명백히 그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 앞에 올 수도 없고 말씀이 그 자체를 위해서 말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사벨리우스는 신격의 셋이 동시에 존재하지 않고 아버지가 먼저고 그 다음이 아들이고 나중에 성령이 하나씩 순서대로 나타난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벨리안주의는 나타난 대로 하나님의 삼일 본성을 부인하는데 예를 들어 마태복음 3장 16-17절에서는 예수님이 침례의 물에서부터 올라오시고, 하나님의 영은 비둘기 같이 임하셨고, 아버지는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3장 16-17절의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입니다. 신격의 세분 모두가 동시에 존재하고 양태론이 가르치는 것처럼 하나씩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 이 두 구절에서 분명하게 나와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앞에 있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후의 교리 논쟁의 특질 안으로 넣지 않고 같은 방해받지 않은 식으로 요한복음 1장 1절이 있는 그대로 말하도록 용납할 수 있습니까? 성경을 연구할 때, 우리는 반드시 역사적인 논쟁을 잊어버리고 순수한 말씀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성경문답자처럼 구절을 해석하는 것은 본래의 의미가 아닌 다른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자기해석(eisegesis)이라 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그의 책 망대의 여호와(Jehovah of the Watchtower)에서 성경문답자는 바로 이러한 실행으로 증인들을 꾸짖었습니다. 그가 말하길:

여호와의 증인들이 성경이 전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모든 교리에서 그들의 지침이라 믿는다고 고백했기 때문에, 이 연구는 전적으로 성경 그 자체가 가르치는 것에 기초하며 가르치는 걸 거라고 생각하는데 기초하지 않는다. 우리는 많은 방식으로 성경을 “자기해석”할 가능성이 많지만 한가지 방법 이상으로 “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 믿음의 주요 교리에 관하여는 그렇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하여 그에게 그 자신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그의 연구를 성경이 사실상 가르치는 것에 근거하여 역사나 다른 바깥의 영향에 따라서 성경이 가르친다고 생각하는 것에 근거하지 말라고 강하게 권하겠습니다. 성경으로 가서 사실상 성경이 말하는 것을 듣고 역사적 논쟁으로 해석하지 말라고 설득하겠습니다.

성경문답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상 어떻게 말하는지를 찾으려는 갈망보다 사벨리안으로 불리는 두려움으로 더 강하게 영향받은 것 같습니다. 이는 그가 라디오 방송에서 이렇게 말함으로 나타났습니다, “‘말씀은 말씀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다’라는 말은 사실상 사벨리안주의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사벨리안주의에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벨리우스는 신격의 세분이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처음부터 사벨리안주의를 반대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둘째 절은 말씀과 하나님이 동시에 함께 존재했다고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문제는 세 번째 절을 볼 때 나옵니다:“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성경문답자가 역사의 색안경을 끼고 성경을 읽는 것을 보았기에 왜 그가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두 번째 나오는 하나님을 “신격”으로 해석하기를 원하는지가 분명합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말하는 것보다 “말씀은 곧 신격이라(The Word was deity)”고 말하기를 선호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두 단어들이 Theon과 Theos로 각각 같지만 그는 첫 번째 것은 하나님이라고 해석하고 두 번째는 신격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Theon은 하나님이라 하고 Theos는 신격이라고 하는데 이런 구분을 하는데 문법적 혹은 언어학상의 이유가 절대 없습니다. 그의 방식으로 구절을 해석하는 것은 말씀이 신성한 특성이 있지만 하나님 자신은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한번 이미 언급한 그의 책에서 성경문답자 자신이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해주었던 충고를 인용해보겠습니다:

단순한 명사가 “신성한”이라고 번역되는 것은 허튼 소리이며 그 명사[관사가 붙지 않은]는 특성의 느낌만을 단지 전달한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Theos를 신성한 특성이라 해석하기를 선호하기 때문에 그가 한 충고입니다. 하지만, 그의 라디오 방송에서 슬쩍 피해 Theos를 신격이라고 번역한다고 그들을 꾸짖고는 자기도 똑같은 것을 합니다. 그리고 그는 항상 두 번째 절의 Theon과 세 번째 절의 Theos를 동등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길 요한복음 1장 1절의 두 무리가 같은 본성을 갖고 있기에 오직 한 하나님만 있다고 믿는다고 했습니다. 1977년 10월 15일 라디오 방송에서 그가 한 말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그[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성을 공유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본성을 공유한다는 말은 그가 하나님이란 말과는 거리가 멉니다. 베드로 후서 1장 4절에 따르면, 심지어는 믿는이들도 신성한 본성을 공유하지만 결코 이것은 그들을 하나님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사실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뿐 아니라 말씀이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하나님의 본성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도 그러합니다. 선재(先在)하신 말씀인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셨습니다. 확대역 성경의 번역자들은 이렇게 그 구절을 번역함으로 요한의 참 뜻을 붙잡았습니다:

태초에[모든 시간 전에] 말씀이 계시니라[그리스도],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더라.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큰 비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 앞에 나와 외부의 방해 없이 읽고 쓰여있는 그대로 정확히 믿을 때 경배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더라.

그의 하나님에 대한 정의로 증명됨

1977년 10월 5일, 성경문답자는 그의 라디오 방송 청취자중 한 명에게 “‘하나님’이란 단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정의를 내려보십시오”라고 질문했습니다. 그후 그 질문에 대하여 그 자신이, “신성한 본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까?”라 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이란 용어는 “신성한 본성”과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같은 방송에서 요한복음 1장 1절을 가리키며, “말씀은 신격의 본성을 공유한다; 말씀은 참 신격이다.”라고 했습니다. 그후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이다[i. e., 그는 하나님과 같은 본성을 갖고 있다], 그는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본성을 공유한다. 그는 아들로서 하나님이며 거룩한 삼일성의 두 번째 위격이다, 그는 그가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신 아버지가 아니다.”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삼일성의 세분에 관하여, “그들은 각각 신성한 본성을 공유한다”라고 했습니다.

성경문답자의 하나님의 대한 관점에 대하여 우리는 네 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신성한 본성”과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분명하게, “‘하나님’이란 단어는...신성한 본성을 의미한다”라 했습니다. 이 정의에 의하면, 하나님은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신성한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가 어떻게 복수의 하나님들을(plurality of Gods) 믿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어느 것의 본성이 수많은 다른 부분들에 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자의 본성은 나무이고 책상의 본성도 나무이고 발판의 본성도 또한 나무일 수 있습니다. 본성에서 이 세 항목들은 다 하나이지만 수적으로 그들은 셋입니다. 아마 누군가는 의자와 책상과 발판이 하나 안에 셋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숫자로는 셋이지만 본성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문답자가 삼일 하나님을 보는 관점입니다. 그의 관점은 신격의 세분, 아버지, 아들, 성령이 숫자로는 셋이지만 그들 모두 신성한 본성을 갖고 있기에 그들을 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문제로 이끌어 줍니다. 말하자면, 성경문답자에게 삼일 하나님의 하나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특성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에게 삼일 하나님의 하나는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닌데 그것은 하나님이 유일하게 숫자로서 한 분이 아니라 신격의 모든 멤버들이 본성의 같은 특성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숫자 일은 하나님의 유일한 숫자입니다. 신격의 하나가 단지 “본체의 하나(unity of substance)”가 아니라고 그의 책 ‘망대의 여호와’ 45쪽에서 말했습니다. 사람 셋을 일렬로 세우고 그들이 모두 다 같은 본체 혹은 본성을 갖고 있기 대문에 그들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본체에서만 한 분이 아닙니다. 아마도 “본체의 하나”일 수는 있지만 성경의 유일한 숫자적인 하나는 아닙니다. 하나님을 나타낼 때 유일한 숫자적 하나는 그분이 본성에서만 하나일 뿐 아니라 그분이 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성경문답자는 신격의 셋으로 시작하였고 “본체의 하나”라는 용어를 설명하면서 신격의 하나를 계속해서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문제를 외면하고 하나님의 유일하신 하나로 시작합니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에 관한 기초 진리는 하나님이 유일하신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타협하지 않습니다:“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6:4). 구약의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이 그분의 존재에서는 다수이고 본성에서 하나라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한 주였고 그것은 숫자적으로 한 분인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이 한 분이라 말할 때 이것은 세 나뉜 무리를 줄 세워서 그들이 같은 본성을 가진 같은 본체로 되어 있으니 이 셋은 하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하나가 아닙니다. 이것은 천연적인 사람의 관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는 노력입니다. 성경 전체 어디에서 하나님이 질에서만 하나이고 양에서는 하나가 아니라고 합니까? 만약 성경문답자가 내가 구약을 인용했다고 항의한다면 나는 마가복음 12장 29절에서 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만약 그가 삼일성의 교리가 복음서에서는 아직 전개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바울이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 말한 고린도 전서 8장 4절을 보라 하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진리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신 하나를 내려놓지 않고도 신약에서 그들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체험하는 것은 주님의 백성들을 유일하신 한 하나님 안에 세 분이 계셔 서로서로 상호침투하는 것을 깨닫도록 이끕니다. 신격의 세분의 상호침투는 한 분이 한 것은 모든 분들이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까지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고”(요14:9)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또한 이사야 9장 6절에서도 아이가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아들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한것 입니다. 한 분이 다른 분들로부터 나뉘어질 수 없는 신격의 세 분의 그러한 상호침투가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아버지는 우리 안에 계시고(엡4:6, 마10:20),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시고(고후13:5), 그 영 또한 우리 안에 계십니다(롬8:9). 이것은 우리 안에 서로 나뉜 세 다른 신성한 존재들이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삼신론입니다. 아닙니다! 서로서로 상호침투하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인 삼일이신 유일하신 한 하나님께 우리 안에 계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태복음 10장 20절은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고린도후서 13장 3절에서 바울은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이라고 합니다. 아버지라고 불리는 한 분과 아들이라고 불리는 다른 분이 나뉘어진 두 존재로서 우리 안에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의미가 확실히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마 여러분은 아버지께서 여러분 안에서 말씀하신다고 말할 수도 있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서 말씀하신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는 한 분이 계신 곳에 두 분 다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요한복음 14장 10절의 요점입니다:“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빌립이 주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대답하시길,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한 면에서 주 예수님이 계시고 또한 아버지가 계시지만, 다른 한 면에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입니다. 이것은 삼일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한 면에서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다른 면에서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계시입니다.

그가 세 나뉜 위격들 안에서의 한 하나님을 가르침으로 증명됨

'본질적인 기독교(Essential Christianity)'라는 제목의 그의 책에서 성경문답자가 말하길 “‘세 위격들 안에 한 하나님’이란 가르침은 확실히 초대 교회에서 받아들여졌다...”(p.22)라고 했습니다. 이미 지적했듯이 그의 “하나님”에 대한 정의는 “신성한 본성”입니다. 이 구절이 “하나님”이란 단어로 대치되었을 때 성경문답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더 분명해집니다. 그는 세 나뉜 위격들이 본성에서 신성하다고 말하는데 그 의미는 그들이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성경이 세 분리된 위격 안에 한 신성한 본성만 있다고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삼신론의 가르침, 세 분리된 하나님들이 있다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문답자의 하나님에 대한 교리이고, 이것이 그가 세 하나님들을 갖고 있는 이유입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세 나뉜 위격들 안에 한 신성한 본성이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나뉘어진 신성한 위격들 안에 한 신성한 본성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극단의 이단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신성한 본성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신성한 존재 안에 있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기독교의 같은 페이지에서는 아다나시우스의 신조를 인용한 구가 있습니다:“위격들을 혼동하지도 않고 본체를 나누지도 않고”. 물론 이 신조는 인간의 생각때문에 모든 것을 좋고 편리한 분류로 나누었습니다. “위격들을 혼동하지도 않고”라는 말은 인격들을 서로서로 혼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신격의 세 분을 절대적으로 구분하는 관념은 공회와 신조들의 후성서시대(post biblical age)에서 발견되었고, 이 후성경시대로부터 성경문답자는 삼일성의 관념을 끌어내었고 성경으로부터 얻은 것이 아닙니다.

신성한 영감 아래서 말을 한 이사야는 “위격들을 혼동했다”라고 비난받을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아들은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불리고”(사9:6)라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똑같이 비난받을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주[그리스도]는 영이시니”(고후3:17)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님 자신도 오류를 혼합했다고 비난받을 수 있는데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고”(요14:9) “영이...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7-18)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위격들을 혼동하는” 문제는 성경적인 계시와 신학적인 형식을 대치하는 시대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후성서시대의 근원으로부터 성경문답자는 그의 삼일성의 교리를 얻었습니다.

그의 교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세 사람들을 일렬로 세운다고 합시다. 이 세 사람들은 모두 인간의 존재들로서 모두 같은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세 개인들에 관하여 우리는 지금 이 세 사람들 안에 한 인간 본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인간 본성을 갖고 있지만 세 나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하나는 그들이 모두 같은 본질로 조성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는데 그것은 인간 존재가 조성된 본체라는 것입니다. 셋의 방면에서 세 개인적인 사람이 서있기에 셋인 것이 확실합니다. 이것이 성경문답자의 삼일 하나님에 대한 관념의 설명입니다. 아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이름을 아버지와 아들과 영으로 바꿀 수 있을 겁니다. 이 분들이 세 신성한 위격들입니다. 세 분 모두 다 같은 신성한 본체로 되어 있고 세 분 모두 다 본성에서 신격입니다. 이것이 단일성이나 셋의 하나를 조성하는 것입니다. 물론 셋의 방면에서는 설명이 필요없는데 이는 여러분 앞에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세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삼신론이라 불리며 삼신론자는 세 하나님들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문답자가 “세 위격들 안의 한 하나님(One God in three persons)”이 있다고 말한 것처럼 시작하지 않고 신격 안에 세 분이 계시다고 말하겠습니다. 세 분리된 위격들 안에 한 신성한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 안에 세 분(우리는 성경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위격이라고 하지 않습니다)이 계신 것을 깨닫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한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성경문답자처럼 한 신성한 본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신성한 존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본성에서만 하나일 뿐이라고 하는데 이는 수적으로 셀 수 없는 무리들을 허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오직 한 하나님만 계시고 한 분이신 이 하나님은 숫자에서는 영원부터 모두 동시에 존재하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일이십니다. 이것이 삼일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성경문답자의 문제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사로잡히지 않고 신학과 교리와 신학자들과 신조(creed)와 공회와 조직적인 사고에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기독교 23쪽에 보면 그가 말하길, “기독교에 의하면 삼일성의 교리는 한 신격의 단일성 안에 세 분리된 위격들이 있다고 가르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마 “기독교에 의하면”이고 “삼일성의 교리가 가르치는”것일 것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것으로부터 아득한 외침입니다. 이것은 그의 신학이지 성경의 해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같은 본성을 갖고 있는 세 무리로 조성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일신교가 아니라 신학의 삼신론입니다.

나는 성경문답자에게 멜로디랜드 신학교에 있는 그의 선배인 로드맨 윌리암스(J. Rodman Williams)의 조언을 취하여 “신조와 교리의 뒤에 있는 성경으로 돌아가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윌리암스박사의 말에 동의하는데 그가 말하길:

성경에는 삼일성의 교리가 없다. “삼일성”이란 말이나 “삼일성 안에 한 하나님과 단일성 안에 삼일성(One God in Trinity and Trinity in Unity)”이란 말도 찾을 수가 없고 구원받기 위하여 이것을 믿을 필요는 확실히 없다. 그러나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그러한 교리를 위한 날 재료들(raw materials)이라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신약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을 격렬하게 확증하면서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오순절의 실재, pp.100-101).

윌리암스 박사가 계속 말합니다,

예수의 초기 제자들은 결코 거룩한 삼일성의 교리로 시작하지 않았다. 어떠한 교리도 없었고 신약도 없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숫자적으로 들었던 오직 한 가지는 그분이 한 분이시라는 것이지 세 분이라는 것이 아니었다. 구약은, “오 이스라엘아 들을지라, 주 우리 하나님은 한 주이시니라”라고 확증한다. 이것은 그들이 배운 교리가 아니라 그들의 삶과 체험에 깊이 배어든 것이다. 정통 유대인들인 초기 제자들은 근본적인 일신교 신자들이었다. 우상숭배나 다신교의 방법으로 그들의 믿음을 희박하게 할 수 있는 어느 것이든지 가증하게 여겼다. 그들은 삼위일체보다 유일신교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그들의 체험에서 놀라운 무언가가 일어났다. 정통적이고 일신교도이며 심지어는 유일신교도인 유대인들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한 하나님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초대 교회가 사람들을 삼일 하나님의 이름 안으로 침례주기 훨씬 전이다. 그렇게 이상한 변화는 더 나은 혹은 더 높은 가르침 때문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러한 것을 야기할 수 없었다. 예전에 한 하나님 안에 있던 그들의 믿음과 같이 삼일로서의 그분의 실제의 확신이 그들의 삶과 체험 안으로 아로새겨졌다(pp.102-103).

성경문답자의 선배의 말을 인용한 요점은 그가 다음과 같은 요점들을 말했다는 것입니다:

  1. 성경에 있는 하나님은 숫자적으로 한 분이시며 세 분이 아니다.
  2. 구약의 유대인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근본적인 일신론자들이다.
  3. 그들의 삼위일체설은 처음의 예수님과 그 다음 성령에 대한 그들의 체험으로 발전되었다.

윌리암스박사가 계속해서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관점의 확대와 발전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일어났고 “그들이 나사렛 예수와의 교제 때문에 일어났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숫자상 한 분이시라는 진리로 시작했습니다. 그후 점차적으로 그들의 예수님과의 체험을 통하고 나중에는 성령과의 체험으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과 접촉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초기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의 실제는 신학이나 교리가 아니었고 오히려 살아있는 체험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교리가 아니라 체험이었습니다. 그들의 신조가 아니라 실제였습니다. 구약의 유대인들과 같이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접했을 때 그들은 한 하나님을 접했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성령을 접했을 때도 역시 이 한 하나님을 접한 것을 알았습니다. 다른 세대의 신학자들은 지적 단련을 통하여 삼일 하나님의 체험을 의미 없는 횡설수설로 바꾸어버렸습니다:“위격들이 혼동하지도 않고 본체가 나뉘지도 않고”.”

우리는 심오한 신학적 형식으로 만족할 필요가 없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전히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서의 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추구하는 모든 자녀들이 신조의 죽고 메마른 환경을 버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체험하는 살아있는 기쁨에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그의 “합성의 단일성(Composite Unity)”란 교리로 증명됨

성경문답자에게는 세 하나님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체적인 하나 혹은 “합성의 단일성(Comspotie Unity)”이라 부르는 그의 가르침으로 결정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그의 책 본질적인 기독교 25페이지에 보면 어떻게 하나님이 세 분이시며 또한 한 분이신지에 대하여 설명을 했습니다. “‘하나’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항상 유일한 존재를 나타내는 것입니까?”라고 질문을 하며 시작했습니다. 그후 계속해서 “유일”하지 않은 하나의 다섯 가지 예를 열거하였는데 이것들은 그가 말하는 “합성의 단일성”의 예들이었습니다.

  1. 아담과 하와. 창세기 2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한 육체”가 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문답자는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서로서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앞에서 하나처럼”되는 것을 의미하였다고 지적했습니다. 그가 말하길, “그래서 우리는 합동의 인물의 하나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안에서 존재하는 것을 하나님 자신이 인정하신 것을 볼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2. 결혼 관계. 예수님이 마가복음 10장 8절에서 말씀하시길,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결혼으로 연결되는 것을 합성의 하나로 여겼습니다.
  3. 민수기 13장에서 정탐군들이 가나안땅에서 돌아올 때 “포도 한 송이 달린 가지”를 메고 돌아왔습니다. 이는 많은 포도가 한 유일한 가지에 달렸다는 것으로 다시 한번 “단지 유일한 ‘하나’를 나타내는 것보다 합동적인 하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4. 국가적인 하나. 문답자가 말하길, “만약 외국 군대가 미국을 공격한다면, 모두가 ‘하나처럼 일어나’ 나라를 방어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모두가 즉시 ‘한 사람’이 되었다고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합동적인 하나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5. 믿음과 교리 안에서의 하나. 누군가가 위기의 때에 “믿음이나 교리 안에서의 하나”나 ‘하나로서 섬’에 대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합동적인 하나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후 문답자는 그의 결론을 내렸습니다:“그러면 하나님의 본성에 대하여서는 합동적인 하나를 받아들일지 않을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 문답자의 하나님의 하나에 대한 관점에 대하여는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유일한 숫자적인 하나가 아니라 단체적인 하나입니다. 이 하나는 두 사람이 결혼으로 연합하거나, 어느 나라의 국민들이 위기의 때에 하나로 일어나거나, 많은 포도들이 달린 한 송이의 포도를 나타낼 때의 하나입니다. 몰론 이런 종류의 하나도 있습니다. “하나”라는 단어를 특정 상황에서 이런 방식으로 정의내리는 것은 그 용어를 위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입니다: 이것이 신격의 하나입니까? 하나님은 단체입니까? 그래서 우리가 나중에 그분을 만날 때 유일하신 한 하나님 대신에 세 구분된 무리를 바라볼 것입니까? 성경문답자가 신격의 하나는 “본체의 하나”이고 “신격은 그 본체이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사실입니까? 이것은 세 사람을 세워놓고 그들이 같은 본체로 조성되어 있고 그 인성이 그 본체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입니까? 우리의 답은 반드시 명백하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따른 삼일 하나님의 하나가 아닙니다.

성경에 따르면 문답자가 제안한 것처럼 “위격들”의 분명한 구분이 없고 오히려 신격의 신성한 세 분 사이에 “끊임없는 상호교통...활동...상호침투”가 있습니다(기독교계의 신조, 필립 쉐프, Vol.1.p.38). 논리적인 분명함과 엄밀함과 정밀함의 걸작으로 비할 데 없지만 이러한 요점들은 성경보다 낫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 신조가 갖고 있는 이러한 종류의 논리적인 분명함과 엄밀함과 정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우르(Baur)의 삼일성 교리에 대한 세 권으로 된 책에서 이 신조를 요약하여 결론지었습니다(Vol.2, p.33), “논리적인 분류들로 하나와 셋의 거칠고 조화하지 않는 반대를 입증하려는 헛된 노력”. 여기에 적어도 삼일 하나님을 “논리적인 분류들”로 일치시키거나 하나와 셋의 반대를 조화시킬 수 없음을 깨달은 작가가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것은 그분의 존재가 또한 삼일이신 유일하신 한 하나님의 문제입니다. 후 세대의 신학자들이 시도했던 위격들의 구별은 성경에서 결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 9장 6절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선지자 이사야가 신성한 영감에 의해 이 말을 했을 때 논리적으로 일관적이도록 강요받지 않았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많은 주석가들과 문답자는 이사야가 신학적으로 더욱 지각 있고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구를 포함하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그 구는 있습니다! 아기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아들은영존 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4장 8-9절에서도 똑같이 명백한 신학적인 정밀성의 결여를 보았습니다. 7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길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주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해서 제자들이 궁금하게 되었습니다. 무리의 혼란을 표현하며 빌립이 말하길,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시길,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주님이 다음에 하시는 말씀을 주의하십시오:“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문답자와 같은 신학자들은 후세대들의 유익을 위해 예수님이 좀더 그분 자신을 표현하시는 방법에서 신중하시길 아마도 바랬을 것입니다. 소위 아다나시우스 신조라 불리는 것과 비슷한 언어로 그분 자신을 표현했다면 아마도 덜 복잡했을 것입니다:“우리는 삼일성 안에 한 하나님을 경배하고 단일성 안에 삼일성이 있다. 위격들이 혼동되지 않고 본체가 나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한 위격과 아들의 한 위격과 성령의 한 위격이 있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신격은 모두 하나이다. 영광은 동일하고 주권도 동등하게 영원하다.” 아다나시우스 신조의 언어가 이러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언어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분과 아버지 사이에 논리적이고 분명하고 정확한 구분을 하지 않으셨고 우리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신격의 세 분의 상호교통과 행동과 상호침투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4장의 또 다른 부분에서 신격의 세 분의 이와 같은 상호교통과 상호침투를 발견합니다. 16,17,18절에서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길: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여기에 신격의 세 분이 계십니다: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그분께서 기도하시는 아버지와 오실 성령입니다. 하지만 17절과 18절을 주의 깊게 보면 주 예수님이 신조의 정밀한 신학적 용어로 말씀하시지 않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의심할 여지없이 주석가들과 신학자들은 예수님이 더 정확하게 말씀하셨기를 바랬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사용하신 언어는 정확히 조직적인 형식에 알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분이 말한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시도록 구하겠다. 이 보혜사는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고 그는 영이라. 세상은 그를 받을 수 없는데 이는 세상이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니라. 하지만 너희는 그를 알고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고 너희 안에 거할 것이라.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영이라 불리는 오실 이는 바로 그때 그들과 함께 거하셨고 후에 그들 안에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후 예수님은 대명사 ‘그’를 ‘나’로 바꾸셔서 말씀하시길,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17절에서 우리 주님은 영이신 그분이 오리라고 하셨고, 18절에서 그분은 내가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확실히 이것은 아다나시우스 신조가 천벌에 처하는 조건으로 정죄하는 “위격의 혼동”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학의 메마르고 복잡한 언어를 버리고 단순하고 복잡하지 않고 양육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언어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그의 추론적인 신학으로 증명됨

문답자가 성경으로부터 사람의 지혜와 추측의 영역으로 빗나갔다는 증거로서 우리는 그의 연구소가 배포한 카셋트 테입에서 나오는 그가 하나님에 대해 정의내린 것을 인용하겠습니다:“한 참된 하나님의 본성 안에 세 영원한 구별된 위격들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다.” 이 정의는 사람의 추측에 대한 뛰어난 예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 전체에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나타내며 “본성”이란 말이 사용된 적이 없고, 신격의 세 분을 분리된 “위격들”이라고 나타낸 곳도 없습니다. 이 단어들과 구들은 문답자가 추측 신학의 세계로부터 가져온 것으로서 이 세상의 지혜의 부문입니다. 그가 “본성”이란 용어를 “실체의 본성이며 그 신격은 그 본체임(nature of substance, and that deity is that substance)”이라고 설명했을 때, 그는 온전히 추측의 영역 안에 있었습니다. 아마 그러한 언어 훈련으로 누군가는 놀랄 수도 있습니다. “위격들”이란 용어를 신격의 세 분에게 적용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수만 개의 단어중 어디에서 신성한 삼일성을 나타낼 때 위격이란 용어를 한번이라도 사용했습니까?

비밀스러우며 사람의 지력이 붙잡을 수 있는 역량을 훨씬 뛰어넘는 문제에서 비밀을 설명하며 성경에 적합하지 않은 용어나 구들을 갖고 오는 것은 위험합니다. 세기의 전환의 때에서 유명한 스코틀랜드 신학자인 맥킨토쉬(H.R. Mackintosh)를 참조하겠습니다. 그의 고전작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교리라는 책에서 그는 윌리암 샌데이(William Sanday)를 인용했는데 그가 말하길, “삼위일체설의 사용에서 위격은 특별한 기능의 입장이나 근본을 나타내는 존재의 [상태]이지만 나뉜 인격들을 중단시킨다. 이것은 나뉨 없는 구별을 나타낸다.” 그후 맥킨토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헬라어 신학의 휘포스타시스(hupostasis)와 같은 의미인 라틴어 동격 페르소나(persona)는 결코 인격(personality)을 의미하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 엄밀히 말해, 그러면,...우리는 “위격”(person)이란 단어를 단지 언어의 빈궁함 때문에 사용한다. 나뉘어지고 지각 있는 존재들을 확증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구별의 실제 안에서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다(p.524)

이 말은 매우 분명합니다.

  1. 위격(person)이란 단어가 삼일성에 적용될 때는 특별한 기능을 나타내지만 나뉜 인격들을 나타내지 않는다.
  2. 분리됨 없이 구별되는 것을 나타낸다.
  3. 우리가 위격(Person)이란 단어를 얻은 헬라어와 라틴 단어들은 결코 인격(personality)이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뜻하지 않는다.
  4. “위격”(person)이란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언어의 빈곤 때문이다.
  5. 신성한 구별의 실제 안에서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지 분리된 지각 있는 존재들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맥킨토쉬박사로부터 인용한 말은 문답자가 읽고 암기하고 그의 생각에 잊혀지지 않게 새겨야 하는데 이는 “위격”이란 단어를 그의 선배 신학자가 사용하면 안된다는 바로 그 방식으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특별한 기능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했을 뿐 아니라 신격의 세분 사이의 나뉜 인격들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사용하여 구별을 나타냈을 뿐 아니라 신격의 세 분 사이의 분열 또한 나타냈습니다. 그는 자아를 담고 있는 존재를 나타낼 때 주로 사용하는 단어인 인격을 이러한 방식으로 사용했고 신격에 세 나뉜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확증하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답자가 성경에서부터 사람의 지혜와 추측으로 빗나가서 삼일 하나님의 문제에 대해 다루고, 그러므로 그 자신을 삼신론의 오류로 빠뜨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학을 추측에 근거하거나 심지어는 성경에서 빗나간 추정에 근거한다면 오류에 빠질 위험이 항상 있습니다. 성경은 역사의 책입니다. 이것은 추측의 문제들을 다루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신격에 관하여 “내용의 내적 분석”을 주지 않습니다. 수학과 존재론(존재의 철학)을 혼합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독특해서 하나님께 적용되는 단 하나의 셈은 하나의 셈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했습니다(신6:4). 그분이 세 분이라고 말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성경에 있는 역사적인 기록은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그분이 삼일이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삼일이신 한 하나님이십니다. 문답자가 가르치듯이 본체의 모양으로 함께 연결된 세 나뉜 위격들이 아닙니다(본질적인 기독교, p.25).

성경의 기자들은 추론적인 신학자들처럼 신격의 세 분 사이의 절대적인 구별을 하지 않습니다. 신격의 세 분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성경을 믿는이라면 아무도 부인하지 않지만, 그 차이들이 너무 광대해서 나뉘어진 인격들이라 여기는 것은 추측의 세계에 성경의 기록들을 방치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9장 6절은 아들에 관한 예언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모든 성경의 학생들은 이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냄을 인정합니다. 문답자는 그의 몇몇 책에서 이 구절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을 또한 인정했습니다. 심지어 이 구절을 사용해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여호와보다 못한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망대의 여호와, p.47).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이 구절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고 논쟁할 때, 그 작가가 “그러면 두 ‘전능하신 하나님’이 있습니까?” 라고 말한 것에 우리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의 삼신론적인 관념 때문에 그는 신격의 세 분 사이에 절대적인 구분을 하고 “그 이름은...영존 하시는 아버지라”라는 구를 읽을 때는 그 자신이 이분이 신격의 유일한 영원하신 아버지라고 말함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게 질문합니다: 신격에 영원하신 아버지가 한 분 이상입니까?

하나님에 관한 그의 추측 신학: “한 참된 하나님의 본성 안에 세 영원한 구별된 인격들이 있다”는 것이 그로 하여금 성경의 기록들을 버리게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단순한 진리와 이 시대의 신학적인 지혜를 바꾸었습니다. 그는 성경에 외부적인 신학적 관점을 취했습니다.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이지 신학적인 하나님이나 신조적인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철학적 진리나 추측적 진리나 추정된 진리는 더 더욱 아닙니다. 성경에 계시된 역사적 진리입니다. 성경 안에 있는 역사적 계시의 입장이 버려지거나, 추정이나 철학이나 추측의 색안경을 통해 해석되면 그 결과는 오류입니다. 이것이 문답자의 실수입니다. 그는 성경 밖에서 나온 하나님에 대한 관점을 취했습니다. 이 성경을 벗어난 관점은 그가 신격 안에 세 나뉘어진 인격들이 있고, 신격의 하나는 사실상 세 나뉜 인격들이 같은 본성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믿게 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닙니다. 이것은 삼신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그가 세 하나님들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기사는 다섯 개의 기사 시리즈 중 세 번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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