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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러 신학교 측과 대화시 제출되었던 (지방)교회 신앙 변증서 (1996. 8월)"  
 
 

(종종 ‘지방교회, The Local Church’라고도 불리는)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이하 ‘지방 교회들’)과 그 출판을 담당하는 리빙 스트림 미니스트리(Living Stream Ministry, 이하 LSM)의 대표자들은 지난 2년에 걸쳐 풀러 신학교의 학문 분야를 인도하시는 몇몇 교수님들과 만나서 대화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바 있습니다. 이 참된 교제의 기간 동안, 풀러에 계신 우리 형제님들은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고, 성경, 삼일(또는 삼위일체, Triune) 하나님, 그분의 구원, 교회와 교회생활을 포함한 그리스도인의 진리와 실행에 관한 우리의 견해 일부를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형제님들이 베풀어 주셨던 따뜻한 환대에 깊이 감사드리며 아울러 우리의 견해들을 관심을 가지고 경청해 주심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존경에 대해서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와 그분들 사이에 어떤 점들에 대해서는 시각차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우리는 그분들이 항상 가장 진실된 그리스도인의 방식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믿는 이를 받으신 방식(롬 15:7)으로 우리를 받았다는 것을 간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제들에 대한 언급 중 일부 내용은 곧 출간될 풀러 포커스(Fuller Focus)에 담길 것입니다.

우리는 풀러 측이 우리에게 열려 있음으로 인해 일부 사람들의 비판을 받아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비판은 지방 교회들 안에 있는 우리가 믿는 것들의 상당 부분에 대해 심한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풀러의 형제님들이 전적으로 우리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했다는 것에 마음이 아팠지만, 그분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대의 빛 안에서 모든 믿는 이들을 받으시려는(롬 14:10) 입장을 취해 주신 것에 따뜻한 목양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진리와 실행에 관한 우리의 관점을 설명하는 변증서를 더욱 확대된 청중들에게 제시함으로써 우리를 받으신 풀러 측의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에 대한 우려를 완화시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 변증서는 우리가 지난 2년 동안 풀러의 형제님들에게 제시했던 것과 여러 가지 면에서 거의 동일한 것으로서, 이것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풀러에 있는 우리 형제님들처럼 우리가 동료 믿는 이들임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인 믿음에 있어 중점이 아닌 문제들에 대한 정죄를 자제하며,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를 함께 연결하시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유지하게 되시리라 진심으로 믿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지방 교회들 안에서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변증이며, (풀러 측에서 이에 동의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해당 주제에 대한 풀러 측의 입장을 대변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풀러 신학교가 어떤 종류의 부당한 비난도 받지 않도록 보호받기를 바라며 아래의 내용이 결코 풀러 신학교와 지방 교회들 (그리고 LSM)의 ‘공동 성명’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는 바입니다.

우리의 공통 신앙

첫째,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우리 모두에게 전달된 공통된 믿음으로서 붙잡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밝히고자 합니다(유 3절). 우리의 신앙의 기초는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영감)으로 된 것을 믿습니다(딤후 3:16). 우리는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이 성령께서 성경 기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도달했음을 믿습니다(벧후 1:21). 우리는 두 성약인 신약과 구약으로 이루어진 성경이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의 선한 기뻐하심을 따라 그들을 영광 안으로 인도함에 있어서 완전하고 충분함을 분명히 믿습니다. 믿는 이들인 우리에게는 성경에 있는 것 이상의 추가된 가르침이나 계시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든 것을 위하여 우리를 장비시키고 온전케 하는 데 유익하고 적합하기 때문입니다(딤후 3:17). 우리가 믿고, 선포하고, 가르치는 모든 것은 성경에 기초해야 하고 또 성경에 의해 제한 받아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로 계시하는 것은 우리의 놀라운 하나님이며, 이러한 성경상의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신 6:4, 고전 8:4). 그분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사 45:5), 그분만이 하나님이십니다(시 86:10). 이것은 고대의 유대인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기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삼일(triune)이심, 즉 성부, 성자, 성령이심을 믿습니다(마 3:16-17, 28:19, 고후 13:13, 엡 2:18, 3:14-17, 계 1:4-5). 이것이 그리스도인 믿음의 핵심 진리입니다. 우리는 신격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께서 영원토록 구별은 되나 또한 영원토록 분리되지 않음을 확고하게 믿습니다. 신격의 셋 위격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동시에’ 공존하시며(사 9:6, 히 1:12, 7:3, 9:14), 각각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벧전 1:2상, 히 1:8, 요 1:1, 행 5:3-4). 그러나 세 분의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며, 한 하나님께서 세 위격(hypostases) 또는 세 인격(person)으로 계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나타나신 세 단계가 아닙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구별은 되나 서로 분리되지 않는 방식으로 영원히 존재하십니다. 더 나아가, 비록 성부께서 신격 안에서 영원한 근원이시지만, 그렇다고 성자와 성령께서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후에 신격 안에 참여한 것으로 간주하거나 양자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며, 셋은 영원토록 동등하게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이시면서 동시에 셋이되실 수 있는가는 인류에게 참으로 비밀 중에 비밀이지만, 이것을 다만 믿고 누리는 것은 가능합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삼일이신 것 곧 셋이시자 하나이신 것은 다만 우리의 인식과 믿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모두와 함께 할지어다” (고후 13:13)라고 격려한 것처럼 우리의 체험과 누림을 위한 것임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믿음의 중심은 성육신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이며,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첫 번째 고백은 그분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항목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선언함에 있어, 우리는 하나님께서 삼일이시며 이 삼일 하나님을 그리스도인 믿음의 핵심 진리로 인식한다는 점을 거듭 밝힙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온전한 사람으로서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갖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은 구별을 유지하며 각각의 본성은 혼잡이나 변동이나 분리 없이 그 고유의 구별된 특성을 유지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신 면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요 1:1, 14, 18). 그분은 참으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고(골 1:15),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자 본체의 형상으로서(히 1:3), 하나님의 모습으로 존재하시며 하나님과 동등되십니다(빌 2:6, 요 5:18). 그분 안에는 신격의 모든 충만이 거하십니다(골 2:9, 1:19). 한편, 그리스도는 성육신을 통하여 참 인간이 되셨습니다. 성경이 담대하게 그분이 “육신이 되셨다”(요 1:14) 라고 선포할 만큼 그분의 인성은 참되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죄만 없으실 뿐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신 분임을 믿습니다(히 4:15). 하나님은 그분의 완전한 지혜를 통해 아들을 죄의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어 육신 안에 있는 죄를 정죄하셨으며(롬 8:3), 우리의 죄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사서 하나님께 되돌리시는 우리의 구속주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삼 일 만에 영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로서 우리의 구주이심과 우리를 우리의 죄들로부터 법리적으로 구원하실 뿐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도 유기적으로 그분의 생명 안에서 구원하신다는 것(롬 5:10, “더욱 그의 생명 안에서1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을 큰 기쁨으로 선포합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부활하신 후에 육신을 입고 아버지께 승천하셨으며, 아버지는 그분을 자신의 오른편으로 높이 올리시어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음을 믿습니다(행 5:31, 10:36). 오늘날 그분은 승천하신 주로서 영광 안에 계시며, 여전히 사람이시자 영원토록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성부나 성령이 아닌 성자께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성취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인생을 사시고, 우리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참 사람으로 죽으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만유의 주가 되시도록 승천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는 그분께서 결코 성부와 성령으로부터 분리되실 수 없고, 성부와 성령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행하실 수 없는 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신 그분의 행하심들은 전적으로 성부와 성령의 운행하심을 동반한다는 것을 똑같이 믿습니다. 본질에 있어서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셨고(마 1:20, 눅 1:35), 영원한 신격 안에서는 물론 그분의 인간 존재 안에서도, 성부는 항상 그분과 함께 계십니다(요 8:29, 16). 그분은 모든 일을 성부와 함께하시고(요 5:19, 14:10), 성령에 의해 하십니다(마 12:28, 18, 행 10:38, 히 9:14). 그분의 영원한 존재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성육신 안에서도 그분은 성부 안에 계시고 성부는 그분 안에 계십니다(요 14:10-11, 20, 10:38, 17:21). 우리는 성자께서 성부와 성령으로부터 분리되시어 한 사람으로 성육신하셨다는 견해는 성경 안에 있는 계시와 일치되지 않음으로 단호하게 배척합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비록 이러한 견해가 오늘날 평범한 다수의 믿는 이들이 충분한 지식이 부족하기에 갖고 있는 막연한 관념일지는 모르나 장구한 교회사 속에서 발견되는 성도들의 간증은 아닙니다.

승천 안에서 그리스도는 지금 만유의 주이시며, 우리는 그분이 교회의 신랑으로서 다시 오실 그분의 재림을 앙망합니다(요 3:29, 계 19:7). 우리는 그분이 왕중의 왕으로서 모든 민족들을 공개적으로 통치하실 그날을 고대합니다(계 19:16). 모든 동료 믿는 이들과 공유하는 우리의 복된 소망은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영화롭게 되고, 그분과 영원히 함께 거하며, 이로써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영원한 표현으로 소유하시고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충만한 누림으로 소유하는 것입니다(계 21:1-22:5).

이러한 소망은 하나님께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의 분깃이며,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다고 믿습니다(엡 2:8). 모든 사람은 그 출생과 행위에 의해 죄인으로 조성되었으며,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하나님께 회개하여(행 2:38, 26:20) 그의 죄를 용서받고, 구속받고, 의롭게 되고, 거듭나야 합니다(행 10:43, 롬 3:24, 행 13:39, 요3:6).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고(요 1:12), 그리스도의 지체가 됩니다(고전 12:27). 이러한 복음을 모든 인류에게 전파하는 것은 하나님의 동역자들인 우리의 큰 특권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시고 그분의 각종 지혜를 알리시기 위하여 교회를 산출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엡 3:10, 2:15). 이 교회는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며(엡 1:22-23, 골 1:24), 모든 세기에 걸쳐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교회는 우주적인 측면에서 하나이며(엡 4:4), 마찬가지로 그 지방적인 표현에 있어서도 지방 교회로서 하나여야 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계 1:11 참고). 많은 교파들의 존재로 증명되듯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교회 문제에 있어서 분명 커다란 불일치가 있습니다. 일부는 심지어 우리의 그리스도인 생활을 위한 기본 조건인 교회의 필요성을 전적으로 부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비록 그것이 우리 모두가 도달해야 할 믿음의 하나(엡 4:13)에 관련된 것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필수적이며 중요한 항목이라는 것이 우리의 이해이자 믿음입니다.2

몇 가지 그리스도인의 진리의 항목에 관한 우리의 독특한 이해

우리는 앞에서 제시한 우리의 공통된 믿음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논쟁없이 받아들여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출판한 사역의 글들 중 일부를 읽은 몇몇 분들은 우리의 이해가 정도(正道)를 벗어났다고 느끼고, 심지어 어떤 분은 더 나아가 우리를 이단시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의 상당 부분은 우리의 책자들을 제한적으로만 접한 것에 기인한다고 믿으며, 때로 우리의 글들이 전체 문맥이 무시된 채 발췌되어 우리가 실제로 믿는 것과는 동떨어진 내용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오늘날 일부 ‘이단감별사들’의 가슴 아픈 행태이며, 우리만이 그들의 이러한 권한 남용의 유일한 피해자는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취한 입장때문에 오는 것으로 느낍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일부 그리스도인의 진리의 항목에 대한 우리의 독특한 이해에 대한 참된 논의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며, 우리의 이해가 많은 그리스도인 교사들, 사상가들, 믿는 이들의 관점과 다르지 않다는 말도 아닙니다. 다른 가르침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참되게 믿는 것처럼 우리는 이들 항목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참된 것으로 믿으며, 일부 진리 항목들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부인할 수 없는 차이점들이 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항목들에 대해서는 우리의 이해나 상대방의 이해 모두에 대해 존경과 관용을 가지고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랄뿐입니다. 우리는 논의가 필요한 이러한 진리 항목들을 우리의 기본 신앙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즉 그러한 항목들은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의 교제 안으로 받거나 거절하는 근거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풀러에 있는 우리 형제님들과 우리 스스로가 해 온 것처럼, 모두가 이런 문제들을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연결하시는 그 영의 하나를 손상시킴 없이 믿는 이들이 의견을 달리할 수 있는 (또는 동의할 수 있는) 항목들로 다루기를 바랍니다. 물론 모든 믿는 이들이 그러한 항목들에 대해 우리와 동일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 곧 우리가 이 진리항목들에 대해서 확고하게 믿는 것처럼 그들도 믿는 것이 우리의 간절하고도 커다란 소망이지만, 이것들은 논쟁의 대상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이 부분 전체를, 모든 신성한 진리와 실재 안으로 우리 모두를 이끄시겠다고 약속하신 진리와 실재의 영께 일임하고자 합니다(요 16:13).


우리는 이 부분에서 우리의 독특한 입장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지만 동시에 일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우리에 대해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몇몇 진리의 항목들에 대한 우리의 독특한 이해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워치만 니(Watchman Nee)와 위트니스 리(Witness Lee)의 저술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습니다. 워치만 니는 기독교계에 매우 잘 알려져 있고 그의 저서들 중 일부는 교계 전반에서 좋은 평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저서중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The Normal Christiam Life)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동일한 ㅂ중을 차지하는 또 다른 성경교사인 위트니스 리는 지방 교회들 외부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도 않고 간혹 그에 대해 의심하는 눈초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참으로 많은 영적 도움과 영적 양식이 되는 가르침과 경건한 본을 보아 온 터라 이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여깁니다. 아마도 이러한 기회를 통해 그의 책자들을 조금이나마 인용하여 제시하는 것이 그에 대한 오해들을 떨쳐버리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위트니스 리 형제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하여 간략한 소개를 드리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1905년 중국 북부지방에서 태어나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19세 때 그는 그리스도께 완전히 사로잡혔고 즉시 그의 남은 일생을 복음을 전파하는 데 드리기로 자신을 헌신했습니다. 그의 사역 초기에 그는 유명한 설교자요 교사요 저술가인 워치만 니를 만났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워치만 니의 인도 아래서 그와 함께 동역했습니다. 1934년에 워치만 니는 그의 출판의 일을 수행하던 상해복음서원의 책임을 위트니스 리에게 맡겼습니다. 1949년,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들이 (중국본토 공산화로 인해-역자 주) 손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워치만 니와 그의 동역자들은 위트니스 리를 대만으로 보냈습니다. 워치만 니는 위트니스 리에게 대만복음서원이라는 이름으로 해외에서 그의 출판의 일을 계속하도록 했는데, 현재 대만복음서원은 영어권의 LSM과 함께 워치만 니의 저서를 출판하는 곳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습니다. 대만에서의 위트니스 리의 일은 주님의 넘치는 축복이 있었습니다. 중국 본토에서 피난한 350여 명의 성도들이 전부였던 대만에 있는 교회들은 5년 사이에 2만 명으로 증가했습니다. 1962년에 위트니스 리는 미국으로 이주해야 한다는 주님의 인도를 느끼고 캘리포니아에 정착했습니다. 미국에서 35년간 사역을 수행하는 동안 그는 지속적으로 주중 집회와 주말 특별 집회에서 말씀을 공급하여 수천 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가 전한 메시지들의 대부분은 800편 이상의 책으로 출판되었으며 이 책들 중 많은 수가 14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는 91세인 1997년 2월에 그의 마지막 공식 특별 집회를 가졌습니다. 위트니스 리의 사역은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과 그리스도의 몸인 믿는 이들의 실제적인 하나를 강조했습니다. 이 두 가지 문제를 관심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는 자신의 돌봄 아래 있는 교회들이 그리스도인의 생명과 기능에서 성장하도록 인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목표는 좁은 분파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몸이라는 그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신성한 삼일성(또는 삼위일체, Trinity) 안에서 아들이 갖고 있는 독특한 특징

아마도 우리에 대해서 가장 많은 논란이 있어 온 신학적 주제는 신성한 삼일성 내에서의 세 위격(인격) 사이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일 것입니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그러한 우리의 이해는 다음과 같은 세 개의 핵심 구절들에 어느 정도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이 구절들은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자주 인용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이라(사 9:6)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혼(a living soul)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a life-giving Spirit)이 되었나니(고전 15:45)


주는 그 영(the Spirit)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첫 번째 구절은, 아들이 아버지라 불리신다고 말하고, 두 번째 구절은 아들이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고 말하고, 세 번째 구절은 아들이 영이시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극단적인 단순화라며 화를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성경의 표현은 외적인 신학적 개념과의 일치를 위해 아무렇게나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학적 개념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모든 개념들은 성경의 사실을 존중해야만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신성한 삼일성 안에 있는 세 위격의 관계에 관한 성경에 따른 정확한 관점은 어찌되었든 성경이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신다고 말한다는 것과 아들이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고 말한다는 것과 아들이 그 영이 되셨다고 말한다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구절들에 동반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손쉬운 방법들이 있고 또한 다양한 해석자들이 신중한 고려 없이 이에 대한 ‘해결책들’을 제시해 왔습니다. 그 모든 내용들을 여기서 전부 다룰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해석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아버지라는 것은 은유적인 표현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삼일성 안에 있는 위격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서 영적 존재를 취하셨음으로 이제 하나의 영이시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삼일성 안에 있는 위격을 가리키지 않는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있는 ‘주’라는 표현은 신성한 삼일성의 두 번째 위격인 주 예수님을 가리키는 특별한 칭호가 아니라 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칭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삼일성 안에 있는 위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러한 해석이나 이와 유사한 해석들이 어려움을 일소해 주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그것들은 성경이 신격 안에 존재하는 심오한 실재에 관해 기록한 사실이라고 우리가 믿는 것들을 더욱 모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격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심오한 실재는 비록 우리가 그 충분한 깊이를 다 알 수는 없다고 해도 우리가 이해하고 감상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일부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이해를 정도를 벗어난 것으로 보아 왔으나 우리는 그러한 시각이 합당한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느낍니다.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 간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 주는 몇 단락의 글을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발췌하여 제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구절들을 강조하기 때문에 양태론적 단일신론자들, 더 간단히 말해 양태론자들이라고 정죄받아 왔습니다. 즉,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은 다만 영원히 구별되지 않는 유일한 신격의 일시적인 (그리고 임시적인) 존재 양태들일 뿐이라는 것과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은 영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단일성(monarchia) 곧 유일성은 영원하다는 가르침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르침은 그러한 사상을 단호하게 거절해 왔으며, 이에 대한 많은 근거들 중 일부인 다음의 발췌문들은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성령께서 내려오신 것은 그리스도께 기름 부으신 것이었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라는 증거였다.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의 그림인데, 아들은 물에서 올라오셨고, 성령은 아들 위에 내려오셨으며, 아버지는 아들에 관해 말씀하셨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동시에 존재하신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신약 회복역, New Testament Recovery Version, 영문판 3 , 마태복음 3장 17절, 각주1)

우리는 성경에 따라 성부가 영원하시며, 성자도 영원하시며, 성령 또한 영원하심을 믿는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싶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 동시에 존재하신다. 요한복음 14장 16절과 17절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라고 말한다. 이 두 구절에서 아들은 아버지께 성령을 보내달라고 기도하신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 동시에 현존하신다. (삼일성에 관한 진리, The Truth concerning the Trinity, 영문판, 10-11쪽)
신성한 삼일성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시에 존재하신다. 그리고 그분들은 영원 과거부터 영원 후까지 동시존재하시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 모두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시다. 성부는 영원하신데, 이것은 성부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가리키는 이사야서 9장 6절에 의해 증명된다. 성자 또한 영원하시다. 아들에 관하여 히브리서 1장 12절은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라고 말하고, 히브리서 7장 3절 또한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라고 말함으로써 그분이 영원하심을 가리킨다. 아울러 성령도 영원하신데, 히브리서 9장 14절은 “영원하신 성령”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모두 영원하시다. …
요약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 영원부터 영원까지 동일하게 영원하시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시며, 동시에 존재하신다.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The Revelation and Vision of God, 영문판, 29-30, 32-33쪽)

우리는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이 영존하시고 또한 영원히 구별되신다는 관점을 확고하게 붙드는 동시에, 각 위격이 나타나시거나 구별된 움직임을 가지실 때에도 항상 세 위격 모두가 분리되심 없이(그러나 여전히 구별되게) 일하심을 또한 인정합니다. 신격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실재를 가리키기 위해 신학자들은 상호내재 (coinherence)라는 말을 사용해 왔는데, 위트니스 리는 주로 이 상호내재의 사상에 기초하여 어떻게 성경이 때로 삼일성의 한 구별된 위격을 다른 위격과 동일시하고 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다음은 이것을 보여 주는 예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동시존재하실 뿐 아니라 상호내재하신다. 삼일 하나님에게 적용되는 상호내재(coinherence)라는 말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 안에 계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주 예수님께서 사복음서에서 하신 말씀에 근거한다. 요한복음 14장 7절부터 10절까지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7절)라고 하셨다. 그러자 빌립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8절)라고 말했다. 그러한 빌립에게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빌립아 내가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9-10절). …
요한복음 14장 10절 외에도, 같은 말이 14장 20절, 10장 38절, 17장 21, 23절에서도 발견된다. 이 다섯 구절들은 모두 아들과 아버지께서 동시에 서로 안에 존재하심을 가리킨다. 이 구절들은 신성한 삼일성이 셋인 동시에 하나인 비밀을 우리가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The Revelation and Vision of God, 영문판, 33쪽)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라고 말하는 요한복음 14장 10절은 삼일성 안에서 볼 수 있는 각 위격의 명백히 구별되는 행동과 세 위격의 분리할 수 없는 운행의 미묘한 관계를 가장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기 때문에, 즉 아들과 아버지께서 상호내재하시기 때문에 명백히 구별되는 아들의 행동(“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아버지의 운행하심(“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명백한 성령의 행동에 세 위격의 분리할 수 없는 운행하심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요한복음 16장 13절부터 15절까지에서 발견됩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느니라
우리는 삼일성 안에 상호내재라는 이러한 놀라운 실재가 있기 때문에 성경이, 비록 미묘한 차이에 둔감한 조직신학자들을 난처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자주 위격들을 서로 동일시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모든 조직신학자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이러한 실재에 대해 무감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본질이 하나인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명해 준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각각의 인격에 관해서는 구별되는 존재인 반면에, 그 위격 간에는 상호왕래(intercommunion)가 있으며 한 신성한 위격이 다른 위격 안에 내재하시어 이로 인해 한 위격의 고유한 일이 다른 두 위격 중 하나에게 속하는 … 것을 가능케 한다. 또한 한 위격의 나타남이 다른 위격의 나타남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호왕래에 대한 성경의 묘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구별이 이들 간의 분리를 의미한다는 생각을 허락하지 않는다. …
이러한 상호왕래는 또한 고린도전서 15장 45절(“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과 고린도후서 3장 17절(“지금 주는 영이시니”)에서 보듯이 그리스도를 “그 영”으로, 그 영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지칭하는 것을 설명해 준다. …
[찰스] 고어,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218쪽,“거룩한 삼일성의 위격들은 분리된 개체들이 아니다. 각각은 다른 위격들을 포함하며,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위격들의 오심이다. 그러므로 그 영의 오심은 분명히 아들의 오심을 포함했다고 보아야 한다.”(A. H. Strong, Systematic Theology: A Copendium [Old Tappan, NJ: Revell, 1960, c1907], 332-333쪽)
위의 글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삼일성 안에 상호내재라는 실재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아들은 우리에게 오셔서 행하신 모든 행동에서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분리되지 않는 운행하심을 동반하셨고, 이로 인해 이사야가 예언했듯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운다고 이해합니다. 우리는 이사야의 예언을 단지 구약에서 사용된 은유적 표현일 뿐이라고 그 의미를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아울러 이 구절이 그리스도인에게 전달하는 엄청난 의미를 사장시켜서도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 구절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영감으로 이루어진 예언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성육신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신 아들께서 아버지 안에 계셨고 그분께서 하신 일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운행하심이었다고 이해함으로써 그 구절의 원문이 갖고 있는 풍성한 의미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삼일성의 세 위격 사이의 구별을 전적으로 무시하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위트니스 리 또한 어떤 사람들이 공격하듯이 그러한 구별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의 첫 번째 단계 안에서 삼일성이 어떻게 일하셨는지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계획하시는 일을 수행하실 때,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영과 함께 역사하셨다고 말할 수 있지만, 아들께서 아버지와 함께 영에 의해 그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우리는 영께서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계획하는 일을 하셨다고도 말할 수 없다. (장로훈련 3권, 이상을 실행하는 길, Elders’ Training, Book 3: The way to Carry out the Vision, 112쪽).
그다음으로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것을 성취하고 수행하는 두 번째 단계에서의 삼일 하나님의 일에 관해서 말할 때도 다음과 같이 구별을 분명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두번째 단계인 성취의 단계에서 아들은 모든 역사를 이루셨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영에 의해 성취하는 역사를 이루셨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또한 영께서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셨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아들께서 아버지와 함께 영에 의해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는 모든 역사를 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로 가셔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가 아버지 예수의 피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피를 흘리셨다고 말해야 한다(요일 1:7). 우리는 아버지꼐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아버지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말할 수 없다. (장로훈련 3권, 이상을 실행하는 길, Elders’ Training, Book 3: The way to Carry out the Vision, 112쪽)
삼일성의 세 위격은 결코 분리되실 수 없다는 것과 한 위격이 일하실 때 세 위격 모두가 운행하신다는 것이 우리가 확고하게 붙들고자 하는 우리의 가르침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성경은 하나님의 경륜의 움직임 안에 뚜렷이 구별되는 행위의 주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종종 한 신성한 위격을 다른 위격들과 동일시합니다.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동일시를 이해하기를 바라며, 더 나아가 그들의 그리스도인의 체험 안에 이러한 동일시를 적용하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생명 주는 영의 동일시

우리의 사역의 중요한 초점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는 이들의 체험이며, 우리는 그러한 체험의 관점에서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이나 고린도후서 3장 17절과 같은 구절들을 해석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서 믿는 이들에게 오시며, 그분은 생명 주는 영 안에서 또한 생명 주는 영을 통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위한 모든 활동을 수행하신다고 이해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신야의 서신서에는 그리스도와 그 영에 대한 분명한 동일시를 발견하는데, 거듭 말하지만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의 세 위격의 구별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며 믿는 이들 안에서 세 위격이 상호내재의 방식으로 존재하시고 운행하심에 따른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는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와 그 영이 동일시되시는 것에 관해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아래의 발췌문은 이 주제에 대한 그의 가르침의 대표적인 예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은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말한다. 마지막 아담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예수님이시다. 생명 주는 영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성령이시다. 성령 이외에 생명을 주는 또 다른 영은 없다. 이 구절은 성경에서 마지막 아담이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생명 주는 영이 되셨다고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한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주는 영이시니”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주는 누구이신가?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은 예수님이시다. 그렇다면 그 영은 누구이신가? 물론 성령이시다. 여기에서 주는 예수님이시고, 그 영은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구절에서 “주는 영이시니”라고 말한다. 주 예수님께서 그 영이시라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경적이다!
앤드루 머리(Andrew Murray)는 그리스도의 영(The Spirit of Christ) 이라는 자신의 책 25장에서 “주 예수님은 높여지시어 그 영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셨을 때 ‘주 영’이 되셨다.”라고 말했다. (삼일성에 관한 진리, The Truth concerning the Trinity, 영문판, 14-15쪽)

제자들 안으로 자신을 거룩한 호흡으로 내쉰 그리스도는 생명 주는 영이시다. 생명 주는 영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호흡이시다. 어떤 신학자들은 그 영이신 그리스도, 즉 호흡이신 그리스도를 언급하기 위해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모든 과정을 완성하신 후에 그리스도는 생명 주는 영이 되셨으며, 이 생명 주는 영은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이러한 분, 곧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는 그 영으로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영이신 자신을 제자들 안으로 불어 넣으셨다. …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는 제자들 안으로 들어가시어 그들의 영적인 생명과 존재의 신성한 본질이 되셨다. (신약의 결론, The Conclusion of the New Testament, 성령, 194-195쪽)
위의 예문은 위트니스 리의 사역의 글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으로서, 만일 이것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생명 주는 영의 관계에 대한 그의 가르침의 전부라고 오해한다면 이러한 글이야말로 그가 명백한 양태론자라는 ‘증거’로 채택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일성에 대해 심도있는 설명을 시도하는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우리가 받는 오해와 유사한 오해를 받을 것입니다. 신학의 역사에 정통한 독자들이라면 이레니우스(Irenaeus), 터툴리안(Tertullian), 어거스틴(Augustine) 그리고 정통성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다른 교사들의 글도 정도에서 빗나간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으나, 그들의 글의 다른 부분에는 그들의 정통성을 확증해 주는 균형잡힌 언급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 역시 이와 같은 균형잡힌 언급들을 하였으나, 그것들은 그가 이단이라는 것에 대한 소위 ‘증거들’로서 출판된 책자들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그 영에 대한 그의 온전한 관점을 보여주는 두 가지 예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바로 이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주이시며 동시에 우리 안에 계신 그 영이시다. “지금 주는 영이시니”(고후3:17). 그분은 주로서 하늘에 계신다. 그분은 그 영으로서 우리 안에 계신다. 하늘에 계신 분으로서 그분은 그분의 통치권과 머리되심과 제사장 직분을 행사하고 계신다. …
그분이 주로서 수행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영으로서 우리에게 적용하신다.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 The Heavenly Ministry of Christ, 영문판, 69-70쪽)

또 다른 보혜사이신 그 영에 관한 말씀과 그리스도의 호흡이신 그 영에 관한 말씀을 읽는 어떤 이들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당신은 그리스도와 그 영이 구별된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와 그 영이 둘이라고 믿지 않습니까?” 물론 나는 외적이고 객관적인 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와 그 영이 둘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또 다른 방면인 내적이고, 주관적인 면에서 볼 때 두 번째 보혜사이신 그 영은 첫 번째 보혜사이신 그리스도의 호흡이시다. 따라서 내적인 방면을 조망할 때 그리스도와 그 영은 하나이시다. (요한복음 강해(속편), 3권, The Fulfillment of the Tabernacle and the Offerings in the Writings of John, 273쪽)
많은 분석을 하지 않더라도 위트니스 리가 그리스도와 그 영이 구별되신다는 관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신학적인 체계화 작업에는 역행하는 것 같지만, 신약 서신서와 같은 목소리로 자신의 사역의 커다란 강조점인 그리스도인의 체험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종종 생명 주는 영과 동일시되신다고 이해했고 또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에 대한 비판 중에서 그리스도와 그 영의 동일시에 관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한 다른 이들의 언급을 추가해서 소개드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이 주제에 관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이 전통적인 가르침과 다르다거나 심지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될 수도 있으나, 위트니스 리 외에도 그와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제임스 던(James D. G. Dunn)은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이분은 우리 시대에 존경받는 신학자 중 한 분으로서 위트니스 리가 많은 주의를 기울였던 성경 구절들 중 일부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혼적인 존재의 모형이라면, 그리스도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영적인 존재의 모형이다. … 요약하자면 45절 하반절은 이에 대한 증거 중 하나인데, 왜냐하면 바울이 [생명 주는 영]에 대한 체험을 통해 높이 올려지신 그리스도께서 영적이면서 육체적인 존재를 가지셨고, 그러한 존재 양식 안에서 그분이 새로운 인성의 본과 선구자이시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 그들 모두가 체험한 생명 주는 영은 다시 사신 예수, 마지막 아담이시며 …
바울은 높여지신 예수를 영적인 존재, … 또는 영적인 범위나 영역이 아니라 그 영, 곧 성령과 동일시하고 있다. … 바울에게 있어 내재적 그리스도론은 성령론이며, 믿는 이들의 체험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물론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The Christ and the Spirit, vol. 1, Christology [Grand Rapids, MI: W. B. Eerdmans, 1998], 164-165쪽)
지금부터 한 세대 전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위트니스 리가 삼일성에 관해 자주 인용한 그리피스 토마스(W. H. Griffith Thomas) 역시 이러한 신성한 진리의 양면성에 대해 언급했으며,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와 그 영의 동일시에 관해 간결하면서도 분명한, 뛰어난 요약을 제공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의 양면 모두를 주의하며 보존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리스도와 그 영은 차이가 있으면서도 동일하고, 동일하면서도 차이가 있다. 아마도 그들의 위격의 특성은 결코 동일하지 않지만, 그들의 임재는 항상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일 것이다. (The Holy Spirit [Grand Rapids, MI: Kregel, 1986; reprint of The Holy Spirit of God, 4th edition, Grand Rapids, MI: W. B. Eerdmans, 1913], 144쪽)
위트니스 리의 사역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아울러 이러한 인용문을 읽는다면 그리스도와 그 영의 동일시는 하나님의 내재적인 존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는 이들의 체험의 영역 안에 있는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스웨트(H. B. Swete)도 동일한 사상을 아래와 같이 확증했습니다.
그 영은 그분의 일에 있어서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와 동등하신 것으로 나타나며 … 그럴 때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는 것은 명백하게 그리스도 자신의 내주하심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된다. … “영이신 주(the Lord the Spirit, 즉 그분의 영화롭게 된 생명의 능력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실제로는 동일한 존재로 여겨진다. (The Holy Spirit in the New Testament, [London, New York: Macmillan, 1912], 306쪽)
이 핵심적인 주제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짓기 전에,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각주를 추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각주는 위트니스 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생명 주는 영의 동일시를 동일하게 인정한 저명한 주석가들인 마빈 빈센트(Marvin Vincent), 헨리 알포드(Henry Alford), 윌리스톤 워커(Williston Walker)의 글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고린도후서] 2장 12절에서 시작되는 이 부분의 문맥에 따르면 여기의 ‘주(the Lord)’는 주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후 2:12, 14-15, 17, 3:3-4, 14, 16, 4:5). 이것은 성경에 있는 분명한 말씀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그 영이시라는 것을 강조한다. “3장 16절의 주 그리스도는 새 언약을 널리 퍼지게 하고 활력있게 하시는 그 영이시다. 우리는 새 언약의 사역자들이고(고후 3:6) 새 언약의 사역에는 영광이 있다(고후 3:8). 로마서 8장 9절부터 11절, 요한복음 14장 16절, 18절과 비교하여 보십시오.”(빈센트). “3장 16절의 주는 3장 6절에 있는 생명을 주는 영이시다. 의미상 여기서 언급된‘주’는 ‘그리스도’이시며 ‘그 영’은 바로 성령과 동일하다. … 그러므로 여기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영이시다.”(알포드). “변화시키시고 내주하시는 영께서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주는 그 영이시다.’”(윌리스톤 워커)(신약 회복역, New Testament Recovery Version, 영문판, 고린도후서 3장 17절, 각주2)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있는 구별되는 두 본성

우리의 가르침 중에서 논쟁의 대상이 된 또 다른 항목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연합(mingling)’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를 모함하는 이들은 우리가 실제로 제시하고 있는 내용은 주의하지 않은 채, 단지 그들 자신이 이단적인 사상을 전달한다고 이해하고 있는 이 단어를 우리가 사용한다고 해서 문제삼아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이 연합 안에서 훼손되지 않고 구별되는 상태로 남아 있다고 믿으며, 이러한 우리의 믿음을 늘 세심한 주의를 가지고 명확하게 밝히고자 했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그의 글에서 이에 대해 여러 차례 설명한 바 있으며 아래의 내용은 그 중 하나를 발췌한 것입니다.
그분[그리스도]은 성령을 통해 그리고 동정녀를 통해 이 두 본질을 가지고 태어나셨다. … 성령을 통해 그분은 신성한 본질을 받으셨고 사람인 처녀를 통해 그분은 사람의 본질을 받으셨다.
연합이란 두 요소가 결합되어 함께 연합되지만 그 두 요소가 그들의 특별한 본성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두 본성은 그 특징을 유지하며, 함께 결합되어 제3의 본성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분이 태어나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온전한 사람이신 하나님-사람이 되셨으며, 두 본성과 두 생명, 곧 신성한 본성과 신성한 생명 그리고 사람의 본성과 사람의 생명을 소유하셨는데, 이 둘은 하나로 연합되었지만 조금의 혼동도 없고 그 특징적인 본성을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으며 제3의 본성이나 제3의 요소가 되는 어떤 것도 산출하지 않았다. (장로훈련 2권, 주의 회복의 이상, Elders’ Training, Book 2, The Vision of the Lord’s Recovery, 13쪽).
우리는 ‘연합’이라는 용어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정의가 타당한 것인가를 검토하는 작업은 잠시 보류하고자 합니다. 그 대신 여기서는 그가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관한 진리를 말할 때 분명하지 않은 것이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기독교 교리사에 밝은 분들은 위 예문에 칼케돈 신학과 칼케돈 신조 (주후 451년) 자체가 극명하게 투영되어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는 “두 본성은 그 특징을 유지하며”라고 말하면서 정통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비록 어떤 사람들은 그가 두 본성이 연합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에 유티커스주의(Eutychianism)를 가르친다고 정죄했지만, 분명히 두 본성이 “함께 결합되어 제3의 본성을 산출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유티커스주의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위트니스 리는 두 본성에 관한 우리의 관점을 확증하기 위하여 칼케돈 신조의 표현을 그대로 반복하면서 두 본성이 “조금도 혼동이 없고, 그 특징적인 본성들을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으며 제3의 본성이나 제3의 요소가 되는 어떤 것도 산출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이와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단락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연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은 좀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연합’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위트니스 리는 연합이란 두 요소가 그들의 특별한 본성을 잃지 않고 결합되는 것, 즉 두 본성이 그 특징을 유지하며 결합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것이 ‘연합’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연합이란 여러 요소들과 본성들의 혼잡을 가리킨다고 하면서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교회가 합당하게 고백해 온 것과 상반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연합의 의미가 그러할지 모르나 표준 영어 사전들은 연합의 의미를 결코 그렇게 정의하고 있지 않습니다. 웹스터 신 국제대사전 제3판(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은 연합을 “어떤 것을 함께 두거나 결합시키는 것으로, 그 결과 두 구성 요소들이 결합 안에서 서로 구별된 채로 남아 있는 것”(Springfield, MA: Merriam-Webster, 1993)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어메리칸 해리티지 영어사전(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Fourth Edition)의 인터넷 판 역시 연합을 “통상 각각의 특성들을 유지한 채 결합하거나 섞는 것.” (
http://www.bartleby.com/61/31/M0313100.html, 2006년 6월 19일 접속)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섞다(mix)’라는 말을 찾아 그 유의어들을 살펴보면, 연합이라는 용어가 갖고 있는 아래와 같은 미묘한 의미상의 차이를 유의어들과의 비교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연합은 개별적인 특성들을 상실하지 않는 결합을 가리킨다. “존경과 놀람이 함께했다(mingled).” - 월터 스코트 경(Sir Walter Scott). “그의 동료들은 자유롭고 즐겁게 토박이들과 어울렸다(mingled).”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
( http://www.bartleby.com/61/25/M0352500.html, 2006년 6월 19일 접속)
어떤 분들은 비록 사전들이 ‘연합’이라는 단어에 대해 이와 같은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운’정의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통상적인 이해와 다르며, 그렇기 때문에 ‘연합’이라는 말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은 실제로는 잘못된 것이라고 논쟁하고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연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많은 이들 중에서 월터 스코드 경과 워싱턴 어빙은 지나치게 문학적이었다고 치부하여 인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늘날 인터넷상에서 쉽게 발견되는 다음과 같은 실생활 속에서의 용례들을 무시하기는 어렵습니다.
양복과 넥타이를 차려입은 어른들과 티셔츠를 입은 학생 또래의 아이들은 루즈벨트의 연설문 인용한 글들을 읽으며 함께 어울렸다(mingled). … (Doug Struck, “Clinton Dedicates Memorial, Urges Americans to Emulate FDR,” Washington Post, 1997년 5월 3일자, http://www.washingtonpost.com/wp-srv/local/longterm/tours/fdr/history.htm, 2006년 6월 19일 접속)

종종 남부의 파리라고 불리는 애쉬빌은 건축양식과 문화가 독특한 조화 (mingling)를 이루어 애팔라치아 지방의 정취와 함께 국제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Community Tour”, Coldwell Banker Kasey and Associates [Web site],
http://www.coldwellbankerkasey.com/community_tour.htm, 2006년 6월 19일 접속)
이러한 예들에서 “양복과 넥타이를 차려입은 어른들”과 “티셔츠를 입은 학생 또래의 아이들”을 구별하지 못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각 계층의 뚜렷이 구별되는 속성들이 이러한 자연스러운 어울림(mingling) 안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남부의 파리인 애쉬빌이라는 도시에 있는 국제적인 분위기는 분명히 애팔라치아 지방의 정취와는 구별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부동산 중개인이 어떻게 두 문화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그 둘이 다르다는 것을 맛보고 감별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유사한 예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전과 일반적인 용례 모두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있는 두 본성과 관련하여 우리가 채택한 연합(mingling)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지지합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우리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관해 우리를 줄기차게 의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따가운 의심의 눈초리를 결코 거두지 않으려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해 숙고하는 데 있어 부지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두 본성에 대한 역대의 논점들을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누군가가 본성의 결합을 묘사하는 단어를 사용하기만 하면 그들의 생각 속에서 적신호가 켜지게 됩니다. 그들 자신은 ‘연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그들이 두 본성을 다만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분리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반대편 극단으로 치우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연합’이라는 단어가 위격의 혼잡과 변질을 의미한다며 우리를 반대하는 경고를 외치지만, 정작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은 “나뉨이나 분리 또한 없으시다.”(칼케돈 신조)라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적신호로 인식되는, 그리하여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 ‘연합’이라는 단어를 왜 포기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위트니스 리 자신도 이 용어에 관련된 역대의 문제점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연합’이라는 단어야말로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있는 두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설명하는 최적의 용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이 단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의 결합을 묘사하는 성경적인 방식이라고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는 레위기2장에 있는 소제가 신성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적인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비유적으로 해석하면서 ‘연합된’(mingled)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 간의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이 단락에서 성경적인 예표에 대한 그의 이해를 엿볼 수 있는데, 그는 거듭해서 두 본성에 대한 합당한 이해가 무엇이며 합당하지 못한 이해는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우리는 레위기 2장에서 ‘연합된(mingled)’이라는 단어를 볼 수 있는데, 성령은 하나님께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갖고 계신 갈망을 묘사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하셨다. 5절은 소제를 준비할 때 기름이 고운 가루와 함께 연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름은 성령이신 하나님 자신을 상징하며(눅4:18, 히1:9), 고운 가루는 주 예수님의 인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기름이 고운 가루와 연합된 것은 하나님께서 인성과 연합되신 것을 상징한다. 기름과 고운 가루는 두 가지 다른 본성인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서 함께 연합된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합은 제3의 본성을 산출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 본성은 그들의 결합 안에서 여전히 구별된다.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를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체험함, Experiencing the Mingling of God with Man for the Oneness of the Body of Chirst, 영문판, 32쪽)
일부 사람들은 위트니스 리처럼 두 본성을 묘사하는 적절한 용어를 찾기 위하여 비유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가 비유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그의 고유한 권한이며, 그가 그러한 방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를 (또는 우리를) 이단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연합이라는 용어가 레위기 2장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데 있어서 지극히 성경적이라고 거리낌 없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위에서 보아 온 것처럼 이 단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의 관계를 가장 적절하게 설명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이것을 사용하는 데 있어 확신이 있습니다. 연합이라는 말이 우리가 가진 가장 완벽한 표현이자 두 본성이 갖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비밀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도운 것이 사실이기에, 우리는 이 귀한 진리에 대한 더 탁월한 이해와 표현을 제공하는 이 단어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회피하기보다는 기꺼이 진리와 함께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비록 현대 신학계에서 연합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그리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유일하게 위트니스 리만이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저명한 신학자인 윌리암 밀리간(William Milligan)도 정확히 동일한 맥락에서 이 단어를 사용했는데, 신성한 영께서 우리의 영 안에 내주하신 이후의 둘의 관계를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연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이 영 안에 거처를 만들 때, 즉 그리스도의 영께서 사람의 영 안에 오실 때, 그 둘은 필연적으로 서로가 분리된 채로 남아 있을 수 없다. 보석을 금테에 물릴 때에는 금은 금으로, 보석은 보석으로 남아 있지만, 그리스도의 영께서 사람의 영 안에 들어오실 때에는 이와 같지 않다. 대신에 그들은 마치 두 가지 다른 기체가 서로 안으로 확산되어 전체적으로 섞이는 것처럼 연합되며, 그 결과 두 기체는 함께 차지하고 있는 공간의 매 입자 속에서 발견된다. … 그분(그 영)은 그들의 존재에 스며드시며, 그분은 그들의 삶의 중심을 차지하신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The Ascension and Heavnly Priesthood of our Lord, [London; New York: Macmillan, 1984], 183-184쪽).

창조주이시자 창조물이신 그리스도

위트니스 리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만 창조물일 뿐 참 하나님은 아니라고 가르친다는 거짓 참소를 받아왔습니다. 이러한 참소는 위트니스 리가 첫 번째로 감내해야 했던 참소로서 그 시기는 그가 대만과 홍콩에서 사역을 수행하던 195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위트니스 리는 골로새서 1장 15절의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자” 라는 표현이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가지신 것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는데, 그 당시 그의 젊은 동역자들 중 일부가 마치 그가 4세기의 아리우스(Arius)처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는다고 간주하며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러한 참소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주로 극동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서양 독자들은 위트니스 리가 골로새서 1장 15절에 대한 현재의 일반적인 해석을 따르지 않았음에도 그가 의미했던 바를 제대로 이해해 왔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그의 글에서 이 문제를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앞선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래에 소개해 드릴 몇 가지 예문만으로로 그의 실제 관점을 충분히 관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창조물 중에서 먼저 나신 분이라는 것은 그분이 모든 창조물 중 첫 번째 항목이라는 뜻이다. 아리우스(Arius) 이단 때문에 골로새서 1장 15절의 이 요점을 헬라어의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성경교사들dms 많지 않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께서 신성하지 않고, 그분이 하나님이 아니고 오히려 영원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가르쳤는데 골로새서 1장 15절을 그의 이단적인 가르침의 근거로 삼았다. 역사에 따르면 아리우스는 그의 이단 때문에 정죄받고 쫒겨났으며 주후 325년 니케아 회의에 의해 추방되기까지 했다. 아리우스의 이러한 이단적인 가르침때문에 니케아 회의 때부터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성경교사들은 골로새서 1장 15절을 문자적인 번역에 따라 해석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리우스처럼 이단이라는 정죄를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 (장로훈련 2권, 주의 회복의 이상, Edlers’ Training, Book 2: The Vision of the Lord’s Recovery, 22-23쪽).

이 요점에 관하여 우리는 교회사 가운데 아리우스주의라는 이단 종파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아리우스주의자들은 비록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분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셨던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기에 하나님이 되셨다고 주장한다. 여호와의 증인은 4 세기의 아리우스에게서 나온 이 이단 종파에 속한다. 아리우스는 “그(아버지의 사랑의 아들)는 …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라고 말하는 골로새서 1장 15절 하반절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께서 창조물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똑같은 본질(헬 ousia)을 갖고 계시지 않으며, 비록 우주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창조되었지만(히1:2, 요1:3) 그분의 존재는 영원하지 않고 어느 시점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께서 창조물이시기 때문에 아버지와 동등될 수 없다고 가르쳤다. … 이러한 가르침은 심각한 이단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께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임을 믿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믿음은 아리우스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 아니라 성경의 순수한 계시에 따른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그분의 신성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인성에 따른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성에 따르면 영원한 하나님, 창조자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성육신하시고 혈육의 몸을 입으심으로 또한 인성을 소유하시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분이 사람이시라는 면에서 볼 때 그분께는 인성이 있으며, 따라서 창조물이시다.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The Revelation and Vision of God, 영문판, 38-39쪽)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 면에서는 창조주이시나, 사람이신 면에서는 창조물이시다. 만일 그분이 창조물이 아니시라면, 어떻게 혈과 육과 뼈를 가지실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지 않았는가? 혈과 육과 뼈를 가지신 몸을 입지 않으셨는가? 정녕 그러하셨다. … 우리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니, 그전에도 그러하셨고, 항상 그러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성육신을 통하여 사람이 되셨다. 만일 그분이 사람이 되시지 않았다면 붙잡혀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실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라는 진리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하자! (골로새서 라이프 스타디, Life-study of Colossians, 81 쪽)
단지 위트니스 리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 라는 구절을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그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연좌제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아리우스도 이 구절이 그리스도가 창조물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했지만, 그는 위트니스 리와는 달리 그러한 해석을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셨다는 자신의 잘못된 관념을 “입증”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쳐왔고, 골로새서 1장 15절에 대한 그의 해석이 결코 이 진리를 훼손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왔습니다. 더 나아가, 비록 위트니스 리가 이 주제에 대한 대다수 현대 해석가들의 견해를 따르지는 않지만, 이 구절이 최소한 어떤 면에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유일한 사람은 아닙니다. 삼일성과 기독론에 대한 정통관점을 수립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아타나시우스(Arianos 2.62-64), 닛사의 그레고리(Eunom. 2.8, 3.3; Perf), 알렉산드리아의 시릴(Thes. 25; Trin. Dial. 4; 6)과 같은 성경교사들도 이 구절이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께서 창조물의 일부라는 것을 가리킨다고 인식했습니다. 아마도 이들 중 첫 번째 사람인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에 대항하여 논쟁했다는 것은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이 구절을 해석할 때 그리스도께서 창조물의 일부라는 사상을 접지 않았습니다. 그가 어떤 면에서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신 그리스도를 창조물의 일부라고 보았지만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그의 주된 주장을 훼손시키지는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위트니스 리 역시 이 구절이 그리스도께서 인간 존재라는 지위, 그러므로 창조된 영역의 일부라는 지위를 가지신 것을 가리킨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했지만, 이러한 사실이 그가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가르쳤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삼일성의 내재적인 면과 경륜적인 면

우리의 가르침 중에서 일부 논쟁이 있어 온 삼일성과 기독론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짓기 전에 삼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상당 부분 떠받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 한 가지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 비공유적 속성의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인지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성육신의 비밀을 통해서 그분 자신을 전달해 오셨음을 믿는 우리는, 신격 안에는 그분의 내재적 존재의 면과 경륜적인 운행의 면이 모두 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난 수 세기 동안 내재적 삼일성(the immanent Trinity)과 경륜적 삼일성(the economic Trinity)을 말해 온 많은 저명한 신학자들에게 동의한다는 뜻입니다. 위트니스 리의 사역에서 이러한 구별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의 저술에서 위트니스 리는 이러한 측면 중 전자에 대해서 존재론적 삼일성(the essential Trinity)이라는 보다 오래된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우리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일구이언한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바대로 진리를 변호함에 있어서, 우리가 사역의 글에서 발췌하여 제시하는 자료들이 종종 겉으로 보기에 서로 모순된 입장을 모두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어떤 문제들에 대해 공개적으로는 정통적인 견해를 표방하면서도 뒤에서는 동일한 문제에 대한 이단적인 견해를 신봉한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의 진리가 담고 있는 여러 면을 모두 이해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기지 않으며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제시하는 데 있어서 이중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일부 사람들은 우리를 헐뜯고자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한 면만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면서 우리의 견해를 균형잡아주는 우리의 이해의 다른 방면은 무시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실을 바로잡기 위해 균형을 잡아주는 면을 제시하면, 우리가 이중적인 탈을 쓰고 있다는 비난과 함께 우리가 겉으로는 이것을 말하고 속으로는 다른 것을 의미하는, 이른바 ‘교활한 자들’이라며 온 세상에 경고합니다. 어쩌면 우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이 글을 읽을 때 그중 일부는 여전히 이와 같은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 대한 그러한 논쟁에는 마땅한 답이 없는데, 그것은 그 논쟁에 무슨 진실이 담겨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그것이 논의의 중점을 무시한 인신공격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른바 일구이언한다고 비판받는 것은 대부분 우리가 신성한 삼일성의 내재적인 면과 경륜적인 면 모두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어떤 면에서는 아들께서 아버지라 불리실 수 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생명 주는 영이시라고 말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동시에,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시고 아들은 그 영이 아니시며, 또한 그 영도 아들이나 아버지가 아니시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전반부는 삼일성의 경륜적인 운행을 고려한 것이고, 후반부는 삼일성의 내재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존재론적 삼일성이 그분의 존재를 위한 삼일성의 본질(essence)과 관련이 있다면, 경륜적인 삼일성은 그분의 움직임을 위한 그분의 계획과 관련이 있다. 신성한 삼일성의 존재도 필요하고, 신성한 삼일성의 계획도 필요하다.
아버지는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시는 일을 하심으로 그분의 계획, 그분의 경륜의 첫 번째 단계를 성취하셨지만, 그분은 이것을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엡1:4-5) 그리고 그 영과 함께하셨다. 이러한 계획이 수립된 후, 아들께서 이 계획을 성취하셨지만 그러나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요8:29, 16:32) 그리고 그 영에 의해(눅1:35, 마1:18, 20, 12:28) 이것을 하셨다. 이제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모든 것을 아들께서 성취하신 이후에, 그 영께서 그분이 성취하신 모든 것을 적용하기 위해 세 번째 단계 안에서 오셨지만, 그분은 아들로서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이것을 하신다(요14:26, 15:26, 고전15:45하, 고후3:17). 이렇게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경륜이 수행되면서도,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존재인 그분의 영원한 동시존재와 상호내재는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 있고 위험에 빠지지도 않는다. (오늘날 주의 회복의 주요 항목들에 대한 핵심 요점들, The Crucial Points of the Major Items of the Lord’s Recovery, 영문판, 10쪽)

삼일 하나님께서 생명 주는 영이 되시기 위해 통과하신 과정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경륜적인 문제이다. 하나님의 변화는 오직 경륜적인 면에서 가능하며, 본질적인 면에서는 불가능하다. 우리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변하시지 않는다.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그분은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시다. 그러나 삼일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 안에서 과정을 거치셨다는 의미에서 바뀌셨다. 처음에는 오직 하나님이셨던 그분께서 하나님-사람이 되셨다. 그분께서 오직 하나님이셨을 때에는 그분께 인성이 없었다. 그러나 그분께서 하나님-사람이 되심으로 바뀌셨을 때 그분의 신성에는 인성이 더해졌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본질에 있어서 바뀌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분은 단지 그분의 경륜 안에서, 그분의 분배 안에서만 바뀌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 안에서 바뀌셨으나, 그분의 본질 안에서는 결코 바뀌시지 않았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 안에서 바뀌셨다 할지라도 그분은 더 이상 경륜적으로 바뀌시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분은 동일할 것이다. (신약의 결론, The Conclusion of the New Testament, 성령, 193쪽)
주의 깊게 분석해 본다면, 우리가 이중의 탈을 쓴 것처럼 보이는 사례들 역시 신성한 삼일성의 내재적인 방면과 경륜적인 방면이라는 관점으로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위 인용문 중 두 번째 글에서 하나님께서 변화를 경험하시고 과정을 거치셨다는 위트니스 리의 언급을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는 바로 이것 때문에 거듭 공격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언급을 글의 전체 맥락에서 본다면 그의 이해가 균형잡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비밀이므로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한지를 충분히 헤아릴 수는 없으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내재적 존재에 있어서는 변화되지 않으시지만 그분의 경륜적인 운행에 있어서는 성육신과 인간 생활과 죽음과 부활을 거치셨고 지금은 생명 주는 영으로서 그분의 믿는 이들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모두 인정합니다.

분명한 것은 삼일 하나님에 대한 어떤 사람의 가르침이 삼일성의 내재적인 방면과 경륜적인 방면을 포함한다고 해서 이것이 일구이언한다는 정죄의 화살을 맞을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며, 오히려 이것은 그의 가르침이 정통적인 가르침의 정수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음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삼일성의 내재적인 방면과 경륜적인 방면은 서로를 무효화시키거나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성경 자체의 균형을 보존합니다. 위대한 교회 역사가인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다음과 같이 심지어 니케아 교부시대부터 이 딜레마가 신실한 학자들을 난처하게 해 왔다고 말합니다.
니케아 교부들의 글 중 적지 않은 부분이 의심할 여지 없는 삼신론의 색채를 띄지만, 이것들은 사벨리우스주의적인 개념을 담은 그들 자신의 또 다른 글에 의해 상쇄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입장은 이들 두 극단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고 간주할 수밖에 없다.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3, [Grand Rapids, MI: W. B. Eerdmans, 1910], 674쪽)
다음 인용문에서 보듯이 샤프는 심지어 양태들(modes)이라는 단어조차도 정통 가르침에 부합되는 것으로 간주하였지만, 그러나 합당한 균형을 이루지 않는다면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교회는 한 신성한 본질과 세 인격이 있다고 가르치지 않고, 한 본질이 세 인격 안에 있다고 가르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개체들로 간주할 수 없다. 오히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안에 계심으로 공동체적인 연합을 이룬다.
이 신성한 한 본질 안에 세 인격(persons)이 있다. 더 나은 용어를 사용하자면 이 신성한 한 본질 안에 세 위격(hypostase), 즉 서로 분리되거나 나눠질 수 없는 동일한 한 통일체의 세 존재 양태들이 있는데, 성경은 이를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고 칭한다. (같은 책, 673, 675-676쪽).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법리적인 구속과 유기적인 구원

이번 단락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논쟁을 일으키지는 않았으나 인류 가운데에서 수행되는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우리의 독특한 관점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요점을 다루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법리적인 구속의 면과 유기적인 구원의 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신약에서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구원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며 구원의 의미와 결과 역시 단지 한 방면이 아니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오랜 관찰에 의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 특히 서양 기독교계는 하나님의 구원을 주로 어떤 것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약을 읽어 볼 때 더욱 중요한 방면은 어떤 것안으로 구원받는 것임을 봅니다. 로마서 5장 10절은 이 두 가지의 차이를 잘 드러내는 동시에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지지하는 핵심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생명 안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구속 역사의 법리적인 방면들을 믿으며 이를 선포할 때마다 감사가 넘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만이 우리의 구원이 의미하는 바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것,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생명 안에서 수행하시는 더욱 완전한 구원의 기초가 된다고 이해합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 대해서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은 주석을 썼습니다.
5장 10절은 로마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이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한 부분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마임아 우리를 위해 성취된 구속이고, 다른 부분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원이다. 로마서의 처음 네 장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구속에 관하여 포괄적으로 말한다. 한편 나머지 열두 장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구원에 관하여 상세하게 말한다. 5장 11절 이전에 바울은 우리가 구속받고, 의롭게 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기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거룩하게 되고 변화되고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형상이 되는 정도까지 구원받지 못했다. 구속, 의롭게 됨, 화목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밖에서 성취되기 때문에 우리를 객관적으로 구원한다. 거룩하게 됨, 변화, 같은 형상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운행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성취되기 때문에 주관적으로 우리를 구원한다. 객관적인 구속은 유죄 판결과 영원한 형벌에서 위치상으로 우리를 구속한다. 주관적인 구원은 우리의 옛사람과 자아와 타고난 생명에서 기질상으로 우리를 구원한다.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생명이신 그리스도 자신 안에서 구원받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유기적으로 그분과 하나이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성장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완전한 구원을 극도로 누릴 것이다. 구속과 의롭게 됨과 화목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결되기 위한 것이며, 그 결과 그리스도는 그분의 생명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영화롭게 하실 수 있다(롬 8:30)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과 영원한 형벌에서 이미 구출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그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있다. (신약 회복역, New Testament Recovery Version, 영문판, 로마서 5장 10절, 각주 2, 4, 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마음의 갈망을 따라 사람을 위해 행하기 원하시는 모든 것에는 법리적dls 큰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생명을 따라 사람을 위하여 유기적으로 행하기 원하시는 모든 것에는 그분의 의로운 요구에 따라 타락한 죄인들을 법리적으로 구속하시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속하실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에게, “ 오 하나님, 당신이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도 좋고 그들 안에서 많은 것들을 유기적으로 이루기를 원하시는 것도 좋지만, 먼저 그들을 구속하여 당신의 의로운 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같다. 이것이 구속이다. 죄인들을 법리적으로 구속하심으로써 하나님은 그분의 마음의 갈망에 따라, 그분의 생명에 의해 유기적으로 그분이 기뻐하시는 대로 자유롭게 행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기쁨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이 그다지 현실성이 없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실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그분이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실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그분이 강도를 구원하기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다. 창녀를 구원하기 원하신다 해도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우리는 강도가 구원받는 것을 보며(눅 23:39-43), 또한 창녀가 구원받는 것을 본다(마 21:31-32, 참조 눅 7:37, 요4:17-18). 오늘날 하나님은 참으로 그분이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실 수 있으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은 법리적으로 요구되는 구속과 하나님의 생명을 통하여 유기적으로 성취되는 구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곧 법리적인 구속, 유기적인 구원, 그리고 구속과 구원의 총체인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구별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유기적인 방면, The Organic Aspect of God’s Salvation, 11-12쪽).
우리의 견해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이 그분의 믿는 이들을 비록 그분의 신격에서는 결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는 하나님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거듭 밝히지만, 우리는 이렇게 말할 때 신격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내재적인 본질과 그분의 경륜적인 행동이 구별된다는 것을 존중합니다. 그분은 홀로 하나님이신데 이것은 그분 자신과 그분의 존재에 의한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유일하게 하나님이신 그분과 연결되고 그분 안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이 되어갑니다.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으로 인해, 사람은 신격 안에는 결코 참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삼일성의 네 번째 위격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이 된다고 해서 결코 경배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창조물로서 갖고 있는 속성들을 결코 잃을 수 없음으로, 결코 창조주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토록 사람의 형태와 사람의 본성을 소유할 것이며, 그러므로 결코 무소부재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 능력은 창조된 그대로 영원히 제한 아래 있을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전지전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물의 영역 안에서나 밖에서나 항상 하나님이시지만, 우리 사람은 오직 창조물이라는 한계 안에서만 하나님과 연결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이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는 말은 다만 믿는 이들을 영원이라는 고지에 올려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 자신이 인성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 그분을 하찮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주지하다시피 이것은 신화(deification)라는 그리스도인들의 고전적인 개념으로서, 초대 교회 시기에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아타나시우스(d, 373)가 남긴 “그가 사람이 되심은 우리로 하나님이 되게 함이라”(Inc. 54.3)라는 유명한 금언은 이 개념을 우아한 문체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처럼 되심은 실로 우리로 하여금 그분 자신처럼 되게 하기 위함이라” (Haer. 5, pref)라고 선언했던 이레니우스(d, circa 200) 의 말을 계승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교부들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라는 바울의 사뭇 유사한 말이 두 성경 교사의 문장 속에 암시적으로 담겨 있다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신화라는 개념은 서양 기독교에서 무시되어 왔는데, 이 때문에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이 의심스런 눈으로 이 개념을 바라보는 것이 사실이며 그나마 오직 로마 천주교만 다소 인정할 뿐입니다. 한편 동방 정교회의 전통 안에 있는 성도들은 신화가 사실상 하나님의 구원의 궁극적인 의미이자 결과라는 사상을 결코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동방 정교회와 달리 지방 교회들 안에 있는 우리는 신화가 성찬의식이나 성례전이나 그밖의 종교적 의식의 결과라고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이 되는 것은 은혜가 역사한 결과이며, 이러한 은혜에 참여하는 길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누리고, 기도하고, 교회의 다양한 모임 안에서 믿는 이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매일의 교회 생활 가운데 그리스도께 참여하고 은혜를 따라 그리스도를 삶으로써 하나님이 됩니다. 일부에서는 구원을 신화(deification)로 간주하는 우리의 관점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우리의 출판물을 읽는 독자분들은 비록 우리의 관점이 현재로서는 개신교 사상 체계의 주류에 속하지는 않을지라도 보배로운 이 진리에 대해 우리가 지극히 정통적인 관점을 붙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한 면에서 우리를 고무시키는 것은 오늘날 개신교인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이러한 이해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며, 심지어 복음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심화된 관점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깊이가 부족한 일부 교사들이 신격 안에 구별되는 두 방면이 있다는 것 곧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과 아울러 인류에게 그분 자신을 결합시키시는 경륜적인 행동이 있다는 것을 무시한 채, 신화라는 단어만을 차용하여 그 합당한 가르침을 기괴하고 참으로 이단적인 것으로 왜곡시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왜곡들을 단호히 거절할 뿐 아니라 우리의 합당한 가르침을 이러한 이단적인 가르침과 동일시하려는 시도들이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는 바입니다.

우리의 관점에 따르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유기적입니다. 우리는 믿는 이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성한 생명의 내적인 역사를 강조하는데, 이러한 내적인 역사는 먼저 믿는 이들을 (문자 그대로) 거듭나게 하고 이어서 점차 그들을 “신진대사적으로” 변화시키며, 유기적인 과정을 통하여 그들을 맏아들이신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을 이루게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죽음이 놓은 법리적인 기초를 인식하고, 감상하고, 선포하지만 그와 동시에 신성한 생명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분의 구원이 하나님의 구원의 더 큰 역사라고 이해합니다. 우리에게 있어 영원한 생명은 다만 장차 누릴 영원한 천국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인 생명, 그분께서 내주하시는 그분의 영을 통하여 믿는 이들 안으로 분배하시는 생명입니다. 이제 하나님 그분 자신에 의해 생기를 얻은 우리는, 양자처럼 법적인 의미에서만 그분의 자녀인 것이 아니라 더욱 본질적인 면에서 다름 아닌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소유한 그분의 유기적인 자녀입니다(요일5:11, 벧후 1:4). 이와 관련하여 요한일서 1장 3절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첫 번째 책임과 특권이 우리의 매일의 공급이신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간 생활과 음식을 먹는 것의 관계는 이에 대한 좋은 예시입니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그들의 공급과 누림을 위하여 생명나무 앞에 두어진 것(창 2:9)을 상기하는 우리는, 새 예루살렘에서 생명나무를 통해 누릴 하나님의 영원한 공급과 누림을 고대하고 있습니다(계 22:2, 14). 이러한 은유들은 믿는 이들이 그 영이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그들의 공급과 누림을 위하여 언제든지 누릴 수 임음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다리를 건너는 동안 그리스도를 현재의 생명나무로서 취하며(참조 요 15:1), 그리스도는 영과 생명이신 그분 자신으로 우리를 풍성하게 공급하고 계십니다(요6:63). 우리는 날마다 그분을 먹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삽니다(요 6:57). 이러한 유기적인 이상을 통해 볼 때 은혜시대 안에서 하나님의 일은 단지 법리적인 것이 아니라 주로 그분 자신을 분배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 영을 통하여 믿는 이들 안으로 분배하심으로써, 그들이 생명과 본성 안에서 그분과 같은 존재가 되도록 만드시고 유기적으로 그분 자신을 표현하게 하십니다. 내적으로는 삼일 하나님에 의해 살아나고, 외적으로는 유기적으로 함께 건축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믿는 이들은 모든 창조물에게 생명과 본성과 표현에 있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거듭나고, 변화되고, 영광스럽게 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믿는 이들의 유기적인 신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영원한 상호거처인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의 글에서 발췌한 아래의 인용문은 하나님께서 현재 하고 계시고 또 얻고자 하시는 바에 대한 우리의 유기적인 이해를 압축적으로제시하고 있습니다.
경륜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경륜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분배는 무엇인가? 헬라어로 경륜(economy)은 오이코노미아(oikonomia)이다. 이것은 ‘가정의 법’, ‘가정 행정’, ‘가정 통치’를 의미한다. 이것은 행정상의 분배, 계획, 경영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가정 경영이다. 성경은 66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많은 가르침들을 포함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성경을 세밀하고 주의깊게 연구한다면 하나님의 경륜이 그분 자신을 사람 안으로 분배하는 계획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 안에서 성취하시고자 하는 일의 초점은 하나님의 분배이다.
신성한 삼일성은 하나님의 분배를 위한 것이다. 분배의 문제는 에베소서 3장 2절과 골로새서 1장 25절부터 27절까지에서 계시된다. 이 구절들에서 ‘청지기 직분’(stewardship)이라는 단어는 ‘분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청지기 직분은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께 선택받고 구속되고 거듭난 사람 안으로 분배하심으로 그분이 그들의 생명과 모든 것이 되시는 것이며, 이로써 우주 안에 그리스도의 유일한 몸을 산출하여 그분의 단체적인 표현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몸은 이 시대에는 교회이고 영원 안에서는 새 예루살렘이다. (하나님의 경륜과 분배하심, The Economy and Dispensing of God, 10쪽)
우리는 여기서 윌리엄 밀리건(William Milligan)을 재차 인용하고자 하는데, 그는 그리스도께서 공기 같은 영이신 것과 그러한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께서 믿는 이들 안에서 수행하시는 경륜적인 역사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위트니스 리가 사용한 용어와 놀랄만큼 근접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위트니스 리가 사용하는 ‘분배하다’(dispenses)라는 단어와 밀리건의 ‘확산하다’(diffuses)라는 단어는 동의어로 볼 수 있습니다.
높이 올려지시고 영화롭게 된 주님의 영은 절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존재의 면에서는 삼일성의 제 3격이 아니지만, 인성과 신성을 모두 소유하신 아들을 통하여 중재되었다는 점에서 바로 그 위격(제3격 - 역자 주)이십니다. 그분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 안으로 그분 자신을 확산하시고 그들 안에 거하시는 것은 바로 그분의 존재의 이러한 특별한 방면에 근거한 것입니다. (The Ascension and Heavenly Ministry of Our Lord [London; New York: Macmillan, 1984], 189쪽)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하나를 위한 참된 터

성경의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있어서 마지막 요점은 지방 교회(또는 각 지방에 있는 교회, the local church)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미국에서 1960년대 초반에 이러한 관점에 따라 모이기 시작한 이래, 우리의 이러한 이해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논쟁의 근원이 되어 왔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의 관점은 우주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오직 하나이듯이, 실행적인 측면에서도 각 지방 안에는 오직 하나의 교회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이해는 1938년에 출판된 워치만 니의 고전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The Normal Christian Church Life)에서 그가 처음 소개한 가르침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주제에 관한 그의 두 번째 책인 교회의 길(Further Talks on the Church Life)에서 워치만 니는 이 문제를 더욱 발전시켰는데, 이 책은 그가 투옥된 1952년, 곧 그의 사역이 조기에 중단되기 직전에 그가 전했던 마지막 메시지들 일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에서 발췌한 아래 인용문에서 워치만 니는 우주적인 교회의 하나를 지배하는 원칙과 아울러 지방 교회의 하나를 정의하는 원칙들을 제시했습니다.
한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는 어떤 사람으로 인해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곧 우리의 형제요 그 지방의 교회이다.
우리는 누가 우리의 형제요 함께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는 동료라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성경에 대한 그들의 견해가 우리와 같은지의 여부나 그들이 주의하는 영적 체험이 우리와 같은지의 여부나 그들의 애호와 풍습과 습관과 취미가 우리와 같은지의 여부를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보혈로 구속되어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우리의 형제로 본다. 우리는 육체의 하나나 의견의 하나 혹은 다른 하나를 요구할 수 없고 오직 성령의 하나만을 보아야 한다. 이러한 하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 있을 수 있어야 하며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 하나를 소유한 사람은 모두 교회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주적인 교회에 적용되는 것이 한 지방 교회에도 적용된다. 우주적인 교회는 성령의 하나를 소유한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지방 교회는 해당 지방에 살고 있으면서 이 성령의 하나를 소유한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단수인 하나님의 교회와 복수인 하나님의 교회들은 본성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범위에서 차이가 있다. 전자는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시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로 이루어지며 후자는 한 지방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로 이루어진다.
한 지방에서 교회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이어야 한다는 것과 반드시 해당 지방에 살아야 한다는 두 가지 요구를 필히 만족시켜야 한다. 우주적인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오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지만, 지방적인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오기 위한 조건은 먼저는 하나님의 되는 것이고 둘째는 해당 지방에 사는 것이다. (영문판, 75, 77, 81쪽)
성경적으로 볼 때 한 도시에 한 교회라는 우리의 이해는 신약에서 발견되는 동일한 실행에 근거합니다. 신약에 명백한 가르침은 없지만, 믿는 이들은 교회의 초창기부터 보편적으로 ‘지방이라는 터’를 교회의 하나를 위한 실제적인 터로 채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도시에 거주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은 그 숫자와 상관없이 그 도시에서 한 교회로 모였습니다 (참조 행 2:41, 4:4, 5:14, 6:1, 21:20). 요한계시록 1장 11절에서는 실제 교회와 그 교회가 위치한 도시와의 동일시가 아래에서 보듯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피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라 하시기로
다음은 이 구절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주석입니다.
이 책을 일곱 교회들에게 보낸 것은 일곱 도시에 보낸 것과 같다. 이것은 초기의 교회 생활의 실행이 한 도시에 하나의 교회가 있는 것, 즉 한 도시 한 교회의 실행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한 도시에 하나 이상의 교회가 존재했던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이것이 거리나 구역을 단위로 하지 않고 도시를 단위로 하는 각 지방의 교회이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의 행정 구역은 반드시 그 교회가 소재하고 있는 도시 전체여야 한다. 즉 그 도시의 범위보다 더 크거나 더 작아서는 안 된다. 그 범위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은 그 도시 안에서 유일한 그 지방의 교회를 구성해야 한다. (신약 회복역, New Testament Recovery Version, 영문판, 요한계시록 1장 11절, 각주 1).
우리의 확고한 신념은 어떤 가르침이나 실행, 또는 어떤 국가적이거나 문화적이거나 개인적인 동기로도 믿는 이들을 분열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 이들의 실행적인 하나는 신약 교회의 원형적인 표현이었고, 그러한 그리스도인 교회의 특징은 11세기의 ‘1차 대분열’(the first Great Schism,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역자 주)과 16세기의 국교회의 출현으로 인하여 분열의 실상이 드러날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믿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뭇별처럼 많은 교리들, 사역들, 실행들, 개인적인 야심들, 국가적 기원과 민족적 기원을 따라 완전히 분열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에 대한 실제적인 표현을 완전히 저버렸습니다. 이처럼 불일치가 만연하다보니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를 특징짓는 분열이라는 현상에 대해 무감각하게 되었고, 심지어 일부는 이러한 분열을 그리스도의 몸이 가진 다양성의 ‘아름다운’ 표현이라고 말하며 고상한 가치를 부여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조롱거리로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아버지께 드린 간청 -“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을 좌절시키는 것은 얼마나 큰 수치입니까?

일부는 우리가 말하는 이러한 ‘실제적인’ 하나는 전혀 실제적이지 않다고 반박하는데, 왜냐하면 오늘날 대부분의 현대화된 도시 안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모두가 그 도시 안에서 하나로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본질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하나를 실행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들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16세기의 대분열 이전에는 대단위의 그리스도인 모임들이 유럽과 중동의 도시들에서 분열없이도 존재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로마 천주교식의 연합으로 되돌아 가자는 말이 아니며 - 우리는 종교 개혁이 가져온 위대한 진보를 인정합니다. – 다만 그리스도인 교회는 결코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주류 교단들은 한 도시 안이나 여러 도시에 산재해 있는 교단 내의 모든 회중들을 아우르는 일종의 ‘교단적인 하나’를 유지하기도 합니다. 만일 교단들을 구별짓는 모든 근거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다 사라진다면, 그리하여 한 도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회중들이 다만 루터교 교리나 감리교 교리나 특정 교리를 따라 그들끼리만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는 더욱 큰 하나를 이룬다면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겠습니까? 분명 우리 모두는 현재 우리가 주장하는 많은 것들을 전부 내려 놓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 안에 존재할 수 있는 많은 차이점들에 대해 우리 자신을 열어 놓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안에서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입지라면, 국민성이나 종교적 실행이나 교리적 선호나 문화적인 차이가 아니라 오직 만유이시며 만유 안에 계신 그리스도만이(참조 골 3:11) 우리의 유일한 입지라면 그분께 이 어떠한 영광이겠습니까! 비록 비주류적 관점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지라도, 이것이 우리가 본 이상이요 꿈입니다.

우리는 실제적인 하나에 관하여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기타 그리스도인 모임들의 입지에 의문을 갖게 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지방 교회가 교회의 합당한 표현이라는 이러한 관점은, 결코 모든 시대에 걸쳐 온 세상에 존재해 믿는 이들을 모두 포함하는 우주적인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의 내재적인 방면을 문제삼거나 축소시키지는 않습니다. 물론“ 한 도시, 한 교회”의 원칙에 따른 모임이 교회의 합당한 표현이지만, 이러한 원칙은 참된 믿는 이라면 누구나 갖는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교회 안에 포함되는 자격을 결코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의 구원 여부를 죄우하거나 누가 참된 그리스도인이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지도 않습니다. 이른바 ‘지방 교회’만이 한 우주적인 교회의 참되며 합당한 유일한 표현이라는 말을 들은 몇몇 사람들은 펄쩍뛰며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를, 우리가 지방 교회만이 참된 교회라고 가르친다거나 더 확대하여 우리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고 기독교계에 있는 그밖의 사람들은 구원도 못 받고 영원한 멸망에 떨어진다고 가르친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우리가 믿는 바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들이 다른 믿는 이들과 교제를 나누는 방식에 상관 없이 참된 믿는 이로 간주하며, 우리의 형제요 자매로 받아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각 교단 내에 있는 믿는 이들이 참되게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부인한다면, 그 자체가 교회의 실행적인 하나에 대한 우리의 신념을 배반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비록 오늘날 기독교계가 잘못된 방식으로 분열되었지만, 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자체는 하나님께 구속받은 보배로운 백성들이라는 것이 우리의 입장입니다. 더 나아가 모든 지방 교회들 안에서 우리가 실행하고 있는 것은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를 우리의 교통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과연 우리의 실행이 이와 같은지를 직접 시험해 보시도록 정중히, 또한 담대하게 여러분 모두를 초청합니다. 지방에 상관 없이, 그곳에 있는 지방 교회의 어떤 모임이든 참석하셔서 그들이 여러분과의 교통을 받아들이는지. 주님의 만찬 상에 여러분이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는지, 여러분이 다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환영을 받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반드시 특정 교리문답을 배워야 한다고 요구하거나, 반드시 특정 신조를 선포해야 한다고 요구하거나, 반드시 특정 실행을 따라야한다고 요구하거나, 특정한 범주의 사람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는 육신 안에 오신 하나님이시고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그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만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 소재한 교회의 구성원이 되기에 충분하며, 해당 지방 교회의 교통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기에 충분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말해온 것과는 달리, 우리의 이상과 실행은 전혀 폐쇄적이지 않으며,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이들인지 평가하는 데 있어서, 아울러 우리가 실제적으로 그들을 받는 데 있어서 모든 믿는 이들을 포함합니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사역의 기간 내내 모든 믿는 이들을 받는 이러한 포괄성에 대해 가르쳤으며, 아래의 인용문은 이것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 지방에 있는 교회의 기본적인 교통은 하나님과의 교통에 근거한다. 하나님께서 받으신 형제라면 우리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에게는 그를 받지 않을 어떤 이유도 없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교회가 아니라 종파이다. … 보편적인(곧 우주적인)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받으신 모든 사람들을 받는다. 지방 교회는 한 지방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신 모든 사람들을 받는다. 상대방이 나와 뭔가 다르거나 부족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를 받는 조건은 오직 하나, 곧 하나님이 받으셨느냐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받으셨다면 우리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한 지방 교회가 첫 번째로 분명히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의 생명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받는 근거로 삼는 것이다. 이것 외에 우리에게는 다른 요구가 없다. 만일 우리가 다른 요구를 조건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다른 종파와 마찬가지로 종파인 것이다. 종파는 정죄된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심각한 일이다. (워치만 니, 교회의 길, Further Talks on the Church Life, 49-50쪽)

우리는 우상숭배(요일 5:21, 고전8:4-7), 음행, 탐욕, 욕하는 것, 여러 가지 추한 죄들(고전 5:9-11, 6:9-10), 분열(롬 16:17, 딛 3:10),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것(요이 7-11) 등의 문제 외에는 다른 사람들의 교리적인 견해들을 비판하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어떤 사람이든지 참된 그리스도인이고 신약의 근본적인 신앙이 있는한, 비록 교리상으로 우리와 다를지라도 그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동일한 주님 안에서 그를 받아들여야 한다. (위트니스 리, 신약 회복역, New Testament Recovery Version, 영문판, 로마서 14장 1절, 각주 3).

우리가 믿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아들이신 것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근거로 하여 사람들을 받아들이신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즉시 받아들이시고, 그가 삼일 하나님을 누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하시고 성취하신 모든 것을 누리도록 인도하신다.우리는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하며, 하나님보다 더 좁아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교리적인 관념이나 종교적인 실행에서 우리와 얼마나 다른가에 관계 없이 우리는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교리나 실행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 사람을 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를 완전히 보여 주고 또한 지킬 수 있다. (위트니스 리, 신약 회복역, New Testament Recovery Version, 영문판, 로마서 14장 3절, 각주 2).
우리는 지방 교회들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처럼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때로 이에 대한 합당한 이해와 실행이 부족했다는 것과, 다른 믿는 이들의 단체에서도 발견되듯이 우리 중에서도 일부 지나치게 열광적이거나 영적 생명이 미성숙한 성도들이 합리적인 행동의 선을 넘은 경우도 있음을 겸허하게 인정합니다. 우리는 포괄적으로 믿는 이들을 받는 문제에서나 성경의 여타 진리를 적용함에 있어서 우리 자신에게 결코 실수가 없었다고 말할 수 없으며, 각지의 모든 믿는 이들이 마땅히 그러해야 하듯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는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용서해주시기를 진심으로 구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지나친 행동들이 있었다 할지라도- 비록 그것들이 우리 중에 있는 일부 열광들이나 미성숙한 성도들이 야기한 것일지라도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우리의 책임으로 돌리는 바입니다- 우리의 확신은 여전히 확고합니다. 즉, 모든 믿는 이들은 단지 성령의 영적이고 보이지 않는 띠 안에서만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거주하는 도시나 마을에서 오직 그리스도인으로서 모임으로써 실제적이고 가시적인 방식(요한복음 17:21, “세상이 믿게 하옵소서”)으로도 하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임을 갖고 봉사를 수행하는 길

결론을 내리기 전에, 우리는 우리가 지방 교회들 안에서 어떻게 모임을 갖고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봉사를 수행하는지에 대하여 간략히 언급하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모임은 살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소유하고 있는 신성한 생명에 대한 누림과 표현으로 충만합니다. 아울러 우리의 집회들은 진리에 초점을 맞춥니다. 즉, 우리는 모임에서 삼일 하나님과 그분의 경륜, 그리스도의 인격과 일, 우리의 내용이신 그 영의 운행에 관한 성경의 말씀과 그 계시를 다룹니다. 우리의 모임들의 또 다른 특징은 상호성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모든 성도들이 말하기를 격려하며, 오직 한 사람이 말하고 그외의 모든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듣기만 하는 성직자-평신도 제도를 거절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모임은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포괄적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인생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의 죄들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죽음에서 부활하신(롬 4:25) 하나님-사람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받고 환영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모임들은 형식보다는 주로 성도들의 영적인 기능을 의존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종교적 의식이나 전통에 따라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더 함양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하여 모인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단체 생활이고 그것은 상당 부분은 우리의 모임 안에서 표현됩니다. 성경이 권면하듯이, 우리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않으며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씁니다(히 10:24-25).

우리가 갖는 가장 단순한 모임은 갓 구원받은 친구들이나 가족들을 위한 가정 모임입니다. 우리는 친척들, 이웃들, 친구들, 동료들이 주님의 구원을 받아 들이도록 돕기 위해 적어도 한 주에 한 번은 가정에서 모입니다. 그들이 구원받으면, 우리는 그들과 가정에서 계속 모이면서 그들을 양육하고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자라도록 도와 줍니다. 이러한 모임들은 통상 소규모이며 한두 명의 목양하는 성도와 새신자들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모임에서 우리는 새신자들이 기도와 찬송과 믿는 이들과의 교제와 성경읽기와 성경공부를 통해 주님을 누리도록 돕습니다.

우리의 염원은 모든 믿는 이들이 유기적으로 기능을 발휘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에베소서 4장 12절이 말하듯이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도들이 가진 은사들을 온전케 하는 최선의 방법이 그들에게 기능을 발휘할 기회를 최대한 많이 주는 것임을 발견했고, 이에 따라 순수하게 이 목적을 위한 모임들을 갖기도 합니다. 이러한 온전케 하는 모임 역시 가정에서 열리며 보통 10명에서 15명 정도의 형제자매들이 참석합니다. 이 모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참석자들이 서로 가르치고 질문하고 응답하고 목양하고 서로를 위하여 중보기도하고 돌보는 모든 것 안에 상호성이 가득한 것입니다. 모든 믿는 이들은 영적인 성숙의 정도나 역량에 상관없이 실제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모두가 기능을 발휘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 서로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임에서 우리 모두는 교회 안에서 합당하게 기능을 발휘하는 법을 서로 배웁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임에서 갖는 친밀한 교제를 통해 사랑 안에서 다른 이들에 의해 바로잡힐 수 있고 그 결과 우리의 기능은 온전케 됩니다. 히브리서 10장 24절과 25절에서 가르치고 있듯이, 이러한 모임에서 우리는 서로 격려하고 서로 권면합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 인 교회는 그 지방 안에서 함께 모여 주님을 단체적으로 표현합니다. 교회의 모임들에는 믿는 이들이 갖는 다른 종류의 회합이 가질 수 없는 특별한 기능이 있습니다. 교회의 모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만찬 집회 또는 떡을 떼는 집회입니다(고전 10:14-22, 11:17-34). 이 집회 안에서 우리 믿는 이들은 함께 모여 주님의 피와 몸의 교통에 참여하고 (고전 10:16-17) 그분을 기념하는데(고전 11:24-25), 전자는 우리의 누림을 위한 것이며 후자는 그분의 누림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참여하는 떡은 전에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부서지신 주님의 육신의 몸을 상징할 뿐 아니라 그분의 비밀한 몸을 상징하며, 우리는 이 몸의 많은 지체들입니다. 주님의 만찬에 참여할 때, 우리는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권면한 대로 몸을 분변합니다(고전 11:29). 이것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분열적인지 또는 우리의 모임이 분열 안에 있는 모임인지를 질문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에 대하여 우리 자신이 합당한지를 살핀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를 표현하는 교회의 위치에 서 있는가의 여부는 바로 이것을 통해 명백히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만찬 앞에 함께 모임으로 이 하나에 참여하고, 공개적으로 전람합니다.
이러한 만찬 집회 이외에도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다음과 같이 또 다른 종류의 모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26절에서 그는“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고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의 헬라어 원문에 따르면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라는 말은 “건축을 위하여 하라”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모임 안에서 모든 형제 자매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 그들의 말하는 기능을 발휘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신언’(prophesying)입니다. 신언은 다만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내는 것’, 곧 믿는 이들을 함양하고 교회를 건축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위해 말하고 그리스도를 말해내는 것입니다(고전 14:3-4). 모두가 신언할 수 있는 이 모임을 통해 형제자매들은 한 지방에 있는 교회로서 그들에게 필요한 가르침과 계시와 위로와 권면을 공급받는데, 이러한 공급은 단지 소수의 은사 있는 이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지체들에 의해 상호적으로 이루어집니다(고전 14:1, 31). 우리는 또한 단체적으로 기도하기 위해 교회로서 함께 모입니다. 신약은 믿는 이들이 기도하기 위해 함께 모였다는 것을 적지 않은 사례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행 2:42, 4:23-31, 12:5). 교회는 최소한 한 주에 한 번 함께 모여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경륜이 수행되고 하나님의 대적의 활동이 봉쇄되며 그 지방 교회의 필요가 채워지는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도 집회에서 한 사람씩 짧고, 자유롭게 기도함으로써 주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움직이실 수 있기를 갈망하는 우리의 부담을 내려 놓습니다. 규모가 큰 교회들에서는 교회의 모임을 약 50명 정도의 구역으로 나누어 실행하여 성도들이 더 많이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배려하는데, 때로는 만찬 집회, 신언 집회, 기도 집회를 구역 단위로 갖기도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신약에 기록된 본을 따라서 신약 사역을 해방하기 위한 모임을 갖습니다. 이 모임에서 은사있는 지체들은 복음을 전파하고, 진리를 가르치며, 성도들을 세우고 훈련시키며, 성경에 있는 특별한 진리를 해방하고, 성경의 특별한 부분에 대한 공부를 인도하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복음전파를 위해 가진 모임이나(행 2:14, 3:12, 10:34) 바울이 가르치기 위하여 가진 모임들(막16:20, 행19:9-10, 20:7, 28:30-31)은 이러한 범주의 ‘사역 집회’에 대한 좋은 예들입니다. 사역 집회를 구성하는 주된 부분은 은사 있는 사람들이 앞서 언급한 방식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지만, 모임의 후반부에는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사역 집회에서조차도 상호적으로 말하는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믿는 이들은 다른 집회를 통해서는 얻을 수 없는 온전케 함을 이러한 사역 집회에서 얻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봉사를 수행함에 있어서, 우리를 통제하는 이상은 모든 믿는 이들이 하나님께 제사장들이라는 것과(벧전 2:5, 9, 계 1:6),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그분께 영적인 봉사를 드릴 수 있고 또 마땅히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믿는 이들이 신약의 복음의 제사장이라고 보며, 이에 근거하여 구체적으로 다음의 네 방면을 위하여, 곧 복음을 전파하고, 갓 구원받은 사람을 목양하고, 우리 중에 있는 믿는 이들을 온전케 하고, 온전케 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 신언하도록 돕기 위하여 수고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그분의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가서 그들을 제자삼으라는 위임을 주셨습니다(마 28:19-20), 우리가 볼 때 주님의 위임을 따라 모든 민족들을 제자삼기 위해서는 주로 이 네 방면에서 수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딤전 2:4), 복음이 전파되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롬 10:13-15). 하나님은 모든 믿는 이들에게 복음을 부탁하셨고(살전 2:4),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편에서는 항상 사람들을 구원하실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꺼이 복음을 전해야만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 자신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접촉하셨고 그분의 이 땅에서의 공생애 동안 많은 사람들을 방문하셨습니다(마 9:35, 막 6:6, 눅 13:22). 아울러 그분은 제자들이 복음을 들고 사람들을 방문하도록 보내셨습니다(눅 9:1-2, 10:1-9). 주님의 승천 이후 초대교회의 믿는 이들은 그분의 본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각지로 나가서 사람들을 방문했습니다(행 8:1, 4, 26:19-20). 오늘날 우리도 친척들과 이웃들과 친구들과 동료들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좋은 소식을 알려줌으로서 동일한 위임을 수행하고 있으며, 참으로 땅 끝에 이를 때까지 우리의 위임을 다할 것입니다(마 28:19-20, 막 16:15, 눅 24:47, 행 1:8).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복음 전파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며 더 나아가 그분의 몸을 건축하는 데 도달하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이 갓 구원받은 사람은 생명이 자라기 위해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 전파가 우리의 위임이라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우리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을 양육하는 것 또한 우리의 위임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분의 어린양을 먹이라고 하셨고 (요 21:15-17), 베드로는 이러한 주님의 위임을 진지하게 받았습니다(벧전 2:2, 5:2). 바울 역시 양육하는 방식으로 믿는 이들을 돌보았습니다(살전 2:7). 오늘날 우리는 동일하게 믿는 이들을 양육하는 책임을 이행하고 있습니다. 모든 새신자들은 지속적인 양육이 필요한 영적인 갓난아이입니다(벧전 2:2). 영적인 양육을 위해 우리는 매주 새신자들의 가정을 방문하거나 기타 편리한 장소에서 함께 만납니다. 이렇게 정기적으로 돌봄을 받는 과정에서 새신자들은 그들의 거듭난 영을 사용하고, 성경을 읽으며, 영적인 노래를 부르고, 주님께 기도하도록 인도를 받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풍성을 섭취하고 신성한 생명을 공급받게 된 결과로 그들은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새신자들이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이러한 정기적이고 지속적인 목양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성도들의 온전케 함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자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사역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려 하심이라”(엡 4:11-12). 하나님의 갈망은 모든 성도들이 온전케 되어 사역의 일 곧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글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께서 그분의 믿는 이들에게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위임을 주신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으며, 그러므로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것 또한 우리의 위임 중 하나입니다. 믿는 이들은 특별히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자와 교사들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몸에게 주신 은사들에 의해 온전케 되는데, 이것은 주로 믿는 이들의 가정에서 매주 갖는 10명 내지 15 명 규모의 가정 모임들(히 10:24-25) 안에서 서로 목양하고 돌보고 중보기도하고 가르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모임들에서는 지정된 설교자나 교사가 필요 없는데, 그 이유는 비록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모든 믿는 이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온전케 할 수 있는 역량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것(딤후 1:14), 곧 성도들이 주님께 받은 것을 향해 열려 있음으로 모든 성도들은 이와 같은 소모임 안에서 서로 온전케 됩니다. 이렇게 서로 온전케 되는 것에 관하여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6절에서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로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바로 모든 교회들 안에 있는 성도들이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갈망은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이며, 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교회 집회에서 믿는 이들이 신언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나 신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건축하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 신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우나니”(고전 14:3-4)라고 말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기서 말하는 신언(prophesying) 곧 교회를 세우는 신언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엡3:8)을 “말해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신언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말하고 그리스도를 말해내는 것으로서 성도들을 함양함과 동시에 교회를 건축합니다. 이것은 신성한 말씀을 말해내는 것이며 오직 믿는 이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권한 것처럼, 모든 믿는 이들은 신언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고전 14:1). 왜냐하면 그러한 신언이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완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믿는 이들은 더욱 전진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 이렇게 하나님을 위하여 말하고 그리스도를 말해 내는 기능을 발휘하는 데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모든 교회 집회들에서 모든 믿는 이들이 상호적으로 말하는 것을 통해 모든 믿는 이들이 건축되고, 격려받고, 함께 자라도록 인도되어 결국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님께서 갈망하시는 완전한 표현에 이를 것이라고 믿습니다(엡 4:13).

이상의 네 가지 문제 곧 복음 전파로 새신자를 낳고, 그들을 양육하고, 온전케 하고, 건축하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그리스도인의 봉사를 구성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능들을 우리 중에 있는 소수의 전문가들에게 전가시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성직자가 없으며, 다만 모두가 (바울이 헬라어 원문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인)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제사장들입니다(롬 15:16).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러한 위임을 충실히 수행하며 또 봉사하기를 갈망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주님의 영광스런 다시 오심을 이끌어 올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이 완성되는 광경을 보기를 간절히 고대합니다. 이렇게 위대하고 우주적인 하나님의 사업 안에서 그분과 함께 수고할 수 있다니, 믿는 이들인 우리에게 이 어떠한 특권인지요!

결 론

풀러에 계신 우리 형제님들이 보여준 친절함과 너그러움에 감사드리며, 이상으로 우리가 믿는 이들의 공통된 믿음으로 간주하는 항목들을 제시하는 작업, 그리고 몇 가지 진리들에 대한 우리의 독특한 이해들 중에서 그간 일부 논쟁이 있었거나 우리의 두드러진 입장을 천명하는 것들을 제시하는 작업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간략한 제시가 모든 질문에 답변을 제시한다거나 모든 우려를 불식시키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소망하는 것은, 우리가 적어도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믿는 이들이며 몇몇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고 싶어할지라도 결코 이단이나 사이비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독자들 중에는 이 제시문 안에 있는 일부 항목들에 대해 질문이 있거나 심지어 반박의 기회를 원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실행들에 대해 더 깊은 교제와 대화를 나눌 의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이 우리 주님에 의해 그 영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어 온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으며, 그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우리의 온전한 관점을 제시하고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지금과 같은 이해를 갖게되었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유들을 자세히 밝힐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 논문과 풀러에 있는 우리 형제님들과의 대화를 허락하심으로써 그러한 기회를 주셨다고 느끼며, 동일한 일을 행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풀러에 있는 형제님들과 가졌던 지난 2년간의 대화가 그러했듯이, 이런 종류의 교제는 우리에 대한 의혹과 소문들을 떨쳐버리는 데 도움이 되며, 아울러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살고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도록 수고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됩니다. 부디 우리의 큰 목자이신 주님께서 이러한 열린 교제와 상호 이해를 통해 우리 모두를 믿음의 하나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 자신을 온전히 앎으로 말미암은 하나 안으로 인도하시기를 기도합니다(엡 4:13).
 

                                                                                                 2007년 1월 20일



1 본고에 인용된 성경말씀은 대한성서공회에서 출판한 개역 성경을 참조한 것입니다. 단, 개역 성경의 번역이 원문의 의미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부득이하게 헬라어 원문에 따른 적절한 표현으로 바꾸고 기울임꼴로 처리하였습니다. –역자 주  [back 1]

2 이 단락에서 제시된 내용은 대부분 위트니스 리(Withness Lee)가 쓴 교회생활의 특수성, 일반성, 실행성(The Speciality Generality, and Practicality of the Church Life, Anaheim, CA, LSM, 1983)의 7쪽부터 14쪽까지에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특별한 언급이 없으면 본고에서 인용한 모든 책은 위트니스 리와 캘리포니아 애너하임에 있는 LSM이 출판한 것입니다. [back 2]

3 본고에서 인용된 LSM의 자료들중 대부분은 이미 한국복음서원을 통해 한국어로 출간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어로 미출판된 자료인 경우에는 ‘영문판’으로 표시하였습니다. –역자 주 [back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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