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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문답자에 대한 답변 (계속됨)

 
 


12월 24일

성경문답자는 믿는 이들에게 신성한 본성이 없다고 말함.

구부러진 길

성경문답자가 1977년 10월 2일 멜로디랜드 신학교에서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선전포고를 한 이래로 나는 지대한 관심을 갖고 그의 대중 연설을 들어보았습니다. 특히 흥미로왔던 것은 매주 토요일 밤 그가 구비구비 구부러진 길을 통해 청취자들을 성경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가 라디오에서 즐겨 인용했던 구절은 디모데후서 2장 15절입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Study to show thyself approved unto God, a workman that needeth not to be ashamed, rightly dividing the word of truth)

이 구절은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l)이 쓴 헬라어 영어 행간 번역본 신약에 더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똑바로 잘라[혹은, 직선으로 잘라]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네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된 자로 드리기를 열망하라 (Be eager to present thyself approved to God, a workman unashamed, cutting straight [or, in a straight line] the word of truth.)

몇 주 동안 나는 성경문답자가 “진리의 말씀”을 똑바로 자르는 것이 아니라 구불구불하게 자르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이 신문의 지난 호 기사들에서 성경을 구부러진 방식으로 자르는 예들이 드러난 바 있습니다. 이사야서 9장 6절의 영원한 아버지가 신격의 영원한 아버지가 아니라고 증명하려고 구불구불하게 길을 가르는 성경문답자를 지난 호에서 보여드렸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두 번째로 언급된 “하나님”을 “신격”으로 번역하여 말씀이 “그와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을 피한 것도 구부러진 길의 한 예임을 지적했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가 고린도후서 3장 17절과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을 다루었던 정도에서 벗어난 방법도 보여드렸습니다. 이 기사에서는 성경문답자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똑바로 자르기를 거부하는 또 다른 부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베드로후서 1장 3-4절입니다:

그의 신성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본성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원문참조)

이 단락에서 성경문답자가 반대하는 것은 “신성한 본성에 참예하는자”란 구절입니다. 최근의 라디오 방송에서 그는 “본성(nature)”이란 단어 대신 “속성(attributes)”이라고 번역하는 것을 선호하여 “신성한 속성에 참예하는 자”라고 만들었습니다.

다섯 가지 질문

문제의 단어는 헬라어로 ‘푸시스(phusis)’입니다. “본성” 대신 “속성”으로 푸시스를 번역하기를 선호하는 성경문답자에 관하여 우리는 먼저 몇 가지 질문들을 해봐야 합니다:

  1. 헬라어 단어 ‘푸시스’의 실제 의미가 속성인가?
  2. 믿을만한 성경 번역본 가운데 헬라어 단어 푸시스를 속성으로 번역한 것이 있는가??
  3. 손꼽히는 주석가와 헬라어 학자들은 그 단어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는가?
  4. 성경문답자 자신도 지속적으로 헬라어 단어 푸시스를 속성이라고 번역하겠는가?
  5. 신성한 본성 없이 신성한 속성을 갖는 것이 가능한가?

한번에 하나씩 이 질문들에 대해 답해봅시다.


(1) 의미

바인(W.E. Vine)은 그의 신약 해설 사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푸시스(PHUSIS)는 가져오다, 산출하다라는 의미의 동사인 푸오(phuo)에서 나온 것으로 어떤 사람이나 사물...“종류” 등의 본성을 의미한다. (예: 천연적 힘 또는 조성)

바인은 신약에서의 두 구절을 그가 이 단어를 정의내린 방법의 예로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에베소서 2장 3절과 베드로후서 1장 4절입니다. 에베소서 2장 3절은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 “본질상(본성)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우리가 갖고 있던 본성이 진노의 자녀의 본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의 속성이나 성격을 가졌을 뿐 아니라 구원받지 않은 사람의 본성 그 자체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베드로후서 1장 4절과 대조를 이루는데 베드로후서에서는 우리가 거듭났기 때문에 바로 하나님의 본성-베드로가 “신성한 본성”으로 부르는-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제라드 키텔(Gerhard Kittel)은 자신이 편집한 신약 신학사전 제 9권에서 “‘신성한 본성에 참예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이 구속에 대한 비종말론적 이해(non-eschatological)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더 나아가 그 구절은 신성한 본성에 참예할 것이라는 미래의 기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본성에 현재 참예함”을 나타낸다고 말했습니다.


(2) 번역

"헬라어 단어 ‘푸시스’가 어느 믿을 만한 번역본에서 “속성”으로 번역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저는 제가 아는 어느 성경 번역본에서도 그렇게 번역된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 언급한 모든 성경 번역본들은 베드로 후서 1장 4절의 헬라어 단어 푸시스를 모두 본성(nature)이라는 영어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마샬의 신약 헬라어 영어 행간역, 아메리칸 스탠다드 버전 1901, 다비의 새 번역 성경, 우스트의 신약 확대역, 루이스 세곤드의 신약(Le nouveau Testament) 불어역에서도 그 구절은 “신성한 본성에 참예하는자” (participants de la nature divine) 라고 합니다.


(3) 주석가

이 단어에 대해 최고의 두 주석가이자 헬라어 학자들은 어떻게 말하는지 보기로 합시다. 아마도 금세기 최고 헬라어 학자라고 여겨지는 로버트슨(A.T. Robertson)은 “신성한 본성”이란 구절에 대해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1장 23절에 있는 새로운 출생을 나타내고 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신약의 유명한 주석가 우스트(Kenneth S. Wuest)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도들은 신성한 본성에 참예하는 자들, 신성한 본성의 공유자들이 되었다. 여기서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 나온 거듭남을 의미하고 있다. 이 신성한 본성은 믿는 죄인의 내적 존재 안에 심겨져서 그의 새 생명과 행동의 근원이 된다. 이것의 힘이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갈망과 능력을 줌으로써 세상의 부패를 피하게 되는 것이다.

로버트슨과 우스트는 둘 다 거듭날 때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이 믿는이 안에 있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 전서 1장 23절에 의하면 믿는이는 “썩지 아니할 씨”로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씨는 신성한 말씀 그 자체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이 말씀을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난 것은 분명한 자연 법칙입니다 (창1:24-25). 이 점에 있어 어떠한 이의도 있을 수 없습니다. 새로 태어난 송아지는 그 아비 소와 어미 소의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송아지는 소의 속성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의 본성도 갖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에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이들은 “하나님으로 났습니다”. 요한복음 3장 6절은 그들이 성령으로 났다고 하고, 베드로 전서 1장 23절은 그들이 살아있는 말씀으로 거듭났다고 했습니다. 확실히 이것은 믿는이가 신성한 본성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이는 신성한 영과 신성한 말씀과 신성한 아버지 그분 자신에게서 났는데 어떻게 신성한 본성이 없을 수 있습니까? 그러한 발상 자체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2장 2절은 “갓난아이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1장 23절에서 거듭난 자들을 나타냅니다. 불필요한 질문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질문하겠습니다: 누가 그들의 아버지입니까? 확실히 그들의 아버지는 신격의 신성한 아버지입니다. 그러면 더 묻겠습니다: 누구의 본성을 그들이 갖고 있습니까? 모든 종(種)은 새로 태어나는 것마다 그 종의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개라면 개의 본성을 갖고 있고, 사람이라면 사람의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전서 2장 2절에서 베드로는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4) 모순

성경문답자 자신은 지속적으로 헬라어 단어 ‘푸시스’를 속성이라고 번역하겠습니까? 아니면 베드로 후서 1장 4절의 번역이 그 구절의 참 의미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편의상 그렇게 한 것일까요? 만약 그가 본성이란 단어를 속성으로 계속해서 바꾼다면 다음 구절들은 이렇게 읽어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6절은 “속성에 대항하여 쓰며”(That which is against attribute), 로마서 2장 14절은 “속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Do by attribute the things contained in the law), 고린도전서 11장 14절은 “속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Doth not even attribute itself teach you), 갈라디아서 2장 15절은 “속성으로 유대인이요”(We who are Jews by attribute)라고 읽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성경문답자가 이 구절들을 그렇게 번역할지 의심스럽습니다. 각 경우마다 ‘푸시스’란 단어는 본성(nature)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고 베드로 후서 1장 4절도 예외가 아닙니다.


(5) 속성은 본성 안에 있음

마지막으로 성경문답자에게 묻겠습니다: 신성한 본성 없이 신성한 속성들을 갖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 생명 자체의 바로 그 본성이 없이 어떤 생명의 종류의 속성을 갖는다는 것이 사실상 가능합니까? ‘푸시스’란 단어는 야고보서 3장 7절인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짐승과 새와 벌레와 해물의 본성은 모두) 다 길들므로 사람(사람의 본성, 원문참조)에게 길들었거니와”에서 두 번이나 나왔는데 처음에는 낮은 동물들을 나타냈고, 다음에는 사람 자신을 나타냈습니다. 이 구절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이 본성에는 두 종류가 있고, 속성에도 두 범주가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사람은 특정한 속성이나 특징들을 갖고 있고, 새들은 다른 속성이나 특징들을 갖고 있습니다. 새의 본성과 새의 속성은 함께 합니다. 창조물이 새의 본성 없이 새의 속성만 가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본성 없이 사람의 속성만 가질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문답자가 가르치는 것처럼 신성한 본성 없이 신성한 속성만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칭 성경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엄청난 무지에 직면한 듯합니다. 성경문답자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신성한 본성은 없이 신성한 속성만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믿는이는 하나님의 본성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하나님의 속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에 대한 모욕일 뿐 아니라 논리 그 자체에도 모욕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다비(Darby)의 말은 그 문제를 합당하고 균형 잡힌 관점으로 보게 합니다:

실제적 기독교의 본질은 우리가 신성한 본성에 참예하고 하나님의 도덕적인 속성을 받는 것이다. 즉 그분의 본성이 우리 안에 주입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어떠한 속성이 우리에게 전가되었다고 하는 것은 말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으로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속성은 어떤 특정 존재에게 속한 것이고 그 안에 있으며 그 존재의 한 부분을 이루기 때문이다...하나님의 의는 그분의 본성에 속한 속성이다. (전집, 제10권. pp. 53-54).

그리스도인이 어느 정도의 하나님의 속성들은 갖고 있으나 신성한 본성은 갖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외견상으로도 논리적 오류가 있음을 다비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속성이 우리에게 추상적으로 전가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분의 본성 안에 있고, 우리는 새로운 출생을 통해 그것을 받았습니다.

보좌를 향하여

1975년에 빌리 그래함이 추천하고 크리스챤 리터러쳐 크루세이드(매우 명망있는 기독교 서적 출판사)에서 출판한 책이 한 권 나왔습니다. 빌리 그래함 사단의 임원은 이 책이 “분명 하나님의 성령의 허가를 받은” 책이라고 말했습니다. 폴 빌하이머(Paul E. billheimer)가 쓴 이 책은 ‘보좌를 향하여’ 라는 책입니다. 12월 17일 라디오 방송에서 전화 질문자가 성경문답자에게 이 책의 한 부분을 읽어주었습니다. 성경문답자는 이것을 듣고는 “그것은 신성모독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빌리 그래함이 추천했다고 말하자 그는 “믿을 수 없네요”라고 말했습니다. 그후에 전화 질문자가 이 책은 크리스챤 리터러쳐 크루세이드에서 출판되었을 뿐 아니라 멜로디랜드 신학교 서점에서 샀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성경문답자가 얼마나 근시안적인지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그 자신만을 정통의 표준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성경이 실제 말하는 것에 대해 익숙하지 못한 초심자들에게는 빌하이머가 한 말이 깜짝 놀랄만한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는 지방 교회들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것보다도 더 강한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는 요한일서 3장 1-2절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유전상의]아들들”임을 말하는 것이며, 히브리서 2장 11절은 그리스도와 그의 형제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나왔음”을 말하고 있고, 마태복음 12장 48-50절은 그분과 그분의 제자들이 다 “같은 아버지에게 나왔음”을 나타내며, 요한복음 17장 21-23절이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신격의 ‘확장’인 구속된 이들”(The Redeemed an 'Extension of the' Godhead)이라는 제목의 단락도 썼습니다. 이 단락이 성경문답자에게 읽어 주었던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가만히 살펴봅시다. 숨을 죽이고 고린도전서 6장 17절의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을 읽겠습니다. 이 연합은 단지 형식적, 기능적, 혹은 이상적인 조화나 관계의 범주를 넘습니다. 이것은 유기적인 연결, “인격들의 유기적인 관계”입니다(Sauer). 새 출생을 통하여 우리는 고유한 우주적 가족의 참 구성원(엡3:15)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낳으신바 된 자녀들(요일 3:2)이며 “신성한 본성에 참예하는 자들”(벧후1:4)이고, 그분의 “유전자”로 수태되어 그분께 낳은 바 되고, 하나님의 씨 혹은 “자손”이라 불리며(요일 5:1, 18, 벧전1:3, 23), 그분의 유전 형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 출생을 통하여 우리는 삼일성의 “근친(近親)”, 일종의 신격의 ‘확장’이 되었다고 경건히 말하는 바입니다 (p. 35).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 그는 “거듭나고”(요3:3), “하나님께로 나고”(요1:13), “영으로 나고”(요3:6), 그리스도가 내주하시고(고후13:5, 갈2:20, 골1:27), 그의 존재 안으로 바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고(골3:4), 하나님 자신의 본성을 받게됩니다(벧후1:4). 누구든지 이것을 과장이나 과대 망상증이나 신성모독이라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것들이 신성한 영감의 말들이며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 의미 없지 않는 한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기억해야 합니다. 천연적인 생각으로는 이것이 아연실색할 말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이 구절들을 그럴듯하게 설명하여 넘어가거나, 비유적 표현으로 여기고 넘어가려는 유혹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불신은 종종 이런 방식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약화시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취한다면 상징적인 의미로 언어가 사용되었음이 분명하게 나타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직 이러한 방법으로만 우리는 “진리의 말씀에 똑바로 선을 그을 수 있습니다”.

신성한 경고

성경문답자처럼 성경을 우리가 기존에 지니고 있는 신학의 편리대로 맞추기 위하여 우리의 기호대로 번역하는 것은 신명기 4장 2절이 경고하고 있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성경문답자는 신명기 4장 2절의 두 가지 권면을 모두 어겼습니다. 거의 모든 성경 주석가들이 ‘본성’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헬라어 단어 푸시스를 “본성” 대신 “속성”으로 번역했고 본문에 없는 말을 더했을 뿐 아니라 단어의 의미를 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하는 말에 가감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방 교회들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어휘”를 수정이나 조정 없이 있는 그대로 취하기를 선호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구속된 인성을 그러한 최고의 위치로까지 올리셨다고 가르칠 때 그 신성한 말씀을 온전히 믿습니다.

결 론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는 우리 구속받은 자들이 “신성한 본성에 참여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벧후1:4).

이것은 다섯 편의 연재 기사 중 첫 번째입니다.


성경문답자의 교육상의 비밀

최근 몇 주 동안 성경문답자는 계속해서 윗트니스 리를 비판하고 지방 교회들을 몹시 나무랐는데 이는 그가 신학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증거도 없이 윗트니스 리가 교육받지 못했다고 주장함으로 청중들에게 윗트니스 리가 믿을만한 신학적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또한 그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교회생활을 실행하도록 돕는 지방교회에서 나타난 능력을 부인하려고 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자기 자신의 교육경력을 자랑하고 자기 혼자만이 성경의 합당한 이해를 갖고 있는 것처럼 도날드 반하우스(Donald G. Barnhouse)나, 알렉산더 히슬랍(Alexander Hyslop), 폴 빌하이머(Paul Billheimer),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을 막론하여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을 비평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인양 우쭐댔습니다. 이 이십세기 교황의 위치를 자처하는 성경문답자는 진리를 비웃고 지식을 신으로 만들었습니다. 대중들에게 호도된 그의 교육비화는 폭로되어야만 합니다.

성경문답자가 멜로디랜드에서 윗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을 공격한 후에 지방교회들은 그의 비난에 대해 신학학위를 갖고 있는 다섯 여명이 쓴 기사로 대응했습니다. 성경문답자는 그 자신과 그의 직원들의 신학 교육배경에 대한 형편없는 사실을 청중에게 숨긴 채 이 다섯 사람의 신학적인 의견이 적합하지 않다고 과장되게 비난했습니다. 신학적 난공불락의 요새라 자칭하면서도 그는 신학 석사학위조차 없습니다. 비록 그가 신학교를 다녔지만 그의 석사 학위는 세속적인 학교인 뉴욕대학에서 받은 것입니다. 더욱 터무니없이 과장된 것은 그가 늘 자랑하던 그의 박사학위가 사실상 산타아나(Santa Ana)에 있는 무인가 학교에서 받은 것이라는 점입니다. 더구나 교수라는 그의 직함은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학교의 종신 재직권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업적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학자가 아닌데도 학자인체 하는 것은 불쌍한 것입니다.

더욱 가련한 것은 그의 보조자들의 신학 교육배경입니다. 지방교회에 관한 대부분의 조사를 한 두 사람 중 아무도 신학 학위가 없습니다. 사실상 한 사람은 비교문학을 전공하고 학사 학위를 받았고, 다른 한 사람은 학사 학위조차도 없습니다! 이러한 세 사람들이 신학 학위를 가진 다섯 사람을 부적당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입니다!

성경문답자는 훈련되지 않고 자격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연구해달라고 부탁했고 그 결과는 예상한 대로입니다. 연구는 이해가 얕았고 연구의 제시에서도 많은 오류들가 있었으며 그리스도인으로의 양심뿐 아니라 학문적 가치 또한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형편없는 연구가 성경문답자의 공격의 토대였습니다. 지방교회에 대한 그의 비난들이 세부적인 논의를 포함하지 못한 것은 당연합니다.

한편 윗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은 매주 12명 이상의 각기 다른 사람들이 학문적이며 성경적인 기사를 써서 대응했는데 청중의 눈에 이것은 진리를 변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교육받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분명하고 논리적이고 성경적인 글을 많이 쓸 수가 있습니까? 거의 모든 기사들은 윗트니스 리의 사역에 의해 열린 성경에서의 빛을 근거로 하여 쓰여졌습니다. 어떻게 “신학적으로 교육받지 않은” 사람이 성경을 그리 잘 알아 철저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우리 중의 많은 이들은 수년 간 다양한 교파 안에서 성경적 무능(無能) 상태에 처해 있었고 이들 중 일부는 심지어 성경문답자의 제자였습니다. 지금은 윗트니스 리의 사역을 통해 말씀 안에서 강하게 되어 성경문답자가 대답할 수 없는 기사들을 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학적으로 교육받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소위 기독교계의 교육받은 사람들에게서는 결코 얻지 못한 것들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웟치만 니의 책들은 도처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어느 신학교에도 다니지않았고 신학 학위도 받지 않았습니다. 윗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들이 교육받지 못했다고 정죄하는 영(靈)은 주님이 목수의 아들이고 제자들이 배우지 못한 어부들이라고 정죄하는 영과 똑같습니다. 이러한 영은 모호한 학위나 직함들을 자랑하며, 마치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자신들 관할구역 밖에서 치료를 받으면 분노합니다. 지방 교회들 안에서 우리는 지위를 높이는 호칭들을 관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사랑 안에서 실제를 붙잡고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을 관심합니다.

성경문답자에게 지방교회들이 쓴 글에 대해 반론하는 신중한 글을 써보라고 하십시오. 그의 열매로서 믿음을 변호하고 말씀을 아는 사람들을 청중들에게 보여주게 하십시오. 성경문답자가 지방 교회의 사람들과 대화하기를 왜 거부하는지에 대해 설명해보라고 하십시오. 라디오 방송 중에 사람들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끊고서는 마치 그들과 계속 전화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계속 말하고 심지어는 “전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길”이란 말까지 하는지 설명해보라고 하십시오. 이것은 속임수입니다. 누구에게 안녕히 계시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누구를 축복하는 것입니까? 지난 토요일 밤 성경문답자는 내 전화를 세 번이나 끊었습니다. 만약 그에게 진리가 있다면 왜 이런 종류의 술책이 필요합니까? 그는 사실상 그렇게 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지방교회 사람들에게 로마서 8장 9-11절을 설명해주었다고 말하는지 이유를 말하라고 하십시오. 멜로디랜드에서의 테이프에서 드러난 사실과는 달리 지방교회가 성경의 본문을 바꿨다는 비난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 보라고 하십시오. 그가 윗트니스 리와 신학에 대하여 논한 적도 없으면서 프레즈노 지역(Fresno area)의 청취자들에게 윗트니스 리와 세 시간 반 동안 신학에 대하여 논한 것 같은 인상을 준 이유를 설명해 보라고 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까? 이것이 학자의 태도입니까? 신학교육은 사람을 이렇게 만듭니까?

교육은 자신이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꼬라고 가르칩니까? 아무이유 없이 남을 공격하고, 그 공격에 대응하면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없다고 비난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교육입니까? 라디오 방송시간을 사용하여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는 것은 주님의 일이고, 신문의 지면을 사서 답변을 하는 것은 주님의 돈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교육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러한 결과를 낳는 교육을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확실히 하와가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어 고통받는 것처럼 오늘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한다고 경고했고, 어떤 가르침은 사람들을 진리의 지식으로 이끌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일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는 살아있는 경고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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